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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2013년 전원, 두 번째 수술, 폐 절제

암삶 47-설명 간호사의 불길한 느낌과 이어지는 주치의의 정기검사 결과에 대한 경고(2013년, 어느 겨울날)

by 힐링미소 웃자 2021.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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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xxx 씨”
“안녕하세요, 선생님?”
“지난주에 받으신 검사 결과 좀 볼까요?
“예…….”
”피검사, 특이사항 없고요. 소변검사, 특별한 일 없고요. 심전도 검사, 좋네요.”
“다 좋네요, 하하”

해도 많이 짧아지는 늦겨울과 초겨울이 만나는 계절은
마치 냉온탕 같아서,
아니면 민물과 썰물이 만나는
그 어디쯤... 그런 기분이라서
심리적으로도 많이 위축되는 시간들이다.
난 설명간호사 선생님의 말씀에
기울이며... 무언가 자꾸 느낌이
싸해져만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뭐요?”
“폐에 있는 암 덩어리들, 수술로 제거가 안 되는 그것들요. 좀 변화가 있어요.”
“어떤?”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건 교수님한테서 들으셔야 해요.”
“예? 예. 참 그렇지요.”

두 번째 병원의 데자뷔?
아니면 기시감?
무슨 단어로 표현하더라도...
왠지 싸~했다.

“그런데 xxx 씨는 항암제 언제부터 드실 거예요?”
“어떤?”
“지난번 저한테서 항암제에 대한 부작용 등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고, 교수님 안 보셨어요?”
“그게, 뵙기는 했지요.”
“그런데요.”
“이러저러한 가능한 약을 말씀하셨어요. 그래 봤자 3가지였는데, 하나는 2차 약의 성격이 강하다고 하시며, 나머지 둘 중에서 하나를 권하시더군요.”
“그런데요?”
“제가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럼 이제 두 달 정도 지났으니, 어떻게 결심이 서셨겠네요?”
“아니요. 아직요.”
“휴~”

난 김 선생님과 일주일 전에 받았던 각종 검사 결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나 같은 환자들은 담당 교수의 진료를 받기 전에 사전 설명은 그 항암 전문간호사에게서 듣게 하는 시스템인 듯했다. 좋은 시스템 같았다. 혈액검사 결과에 쓰인 그 엄청난 숫자들 하며, 소변검사, 심전도 검사의 항목들 하며, 그런 것들을 주치의가 환자에게 다 설명하고, 진료도 보고, 질문에 답도 하고, 처방도 내리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듯했다.

난 항상 각 진료마다 해당 검사 결과 기록지를 발급받곤 했는데, 그때마다 족히 3장은 됐다. 그걸 진료시간에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특히 나처럼 엄청난 질문을 해대는 환자를 만날 경우엔 더더욱..... 그날도 이어지는 교수님과의 진료시간에 뭔가 물어볼 어떤 걸 준비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 순간은 참 묘사하기 힘든 순간들의 연속이다. 이를테면, 설명 전문간호사와의 면담이 고난도의 롤러코스터 티켓을 사는 거라면, 주치의의 진료실에 들어가는 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이고, 그 진료실 의자에 앉으면 롤러코스터의 안전벨트를 매는 것이다.

자, 이제 그분의 입이 열리기 시작한다. 내가 탄 롤러코스터가 예열 굉음을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입술을 보는 순간부터 머리가 벌써 띵~~! 해지고, 하얘진다. 난 카운트다운을 한다. 그의 입술이 열리는 전 과정이 미세한 슬로모션으로 잡히며, 내 심장박동은 기하급수로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첫음절이 내 귀의 청각기관에 잡히기 시작한다. 동시에 뇌로도 보내지며, 온갖 가능한 변수들과 상상 조합을 이루며 번개 같은 속도로 연산을 시작한다.

그의 입에서 떨어진 의학적 단어들이 하나하나의 자음과 모음으로 분해되며 각각 다른 시각에, 시차를 두며,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진료실 바닥에 떨어졌다. 내 귀에 들러온 것들은 조사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부사들이었을 뿐, 의학적인 것들은 애써 피했다는 걸 문득 깨달으며, 난 바닥으로 떨어지는 중요한 의학 어휘들을 다시 주워서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 저장했다. 아마 이 진료실을 나가면 난 다시 그것들을 꺼내 재조합하는 과정을 수행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년 반 동안 그런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항상 날 힘들게 했었다.

하기야 그런 과정은 실은 아무런 실속이 없는, 에너지 낭비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나의 주치의가 말하고 있는 검사 결과는 이미 과거의 것이며, 내가 머릿속에서 하고 있는 모든 상상은 그저 두려움에서 비롯한 걱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걱정은 그저 걱정이어서 내가 의학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저 즉자적인 반응일 뿐!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주치의 선생님과의 상담이 거의 끝날 무렵 난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하며 좌절과 절망을 맛보게 됐다. 이젠 무엇이 됐든 둘 중의 하나는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나의 턱밑까지 와 있었다는 걸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xxx 선생은 보시고 오셨지요?”
“예.”
난 침을 꿀꺽 삼키며 두 손을 가지런히 양 무릎에 얹었다. 두 다리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온몸에 너무 힘을 준 게 틀림없었다.

“폐 수술 직후 CT를 찍으셨었고, 여름에 한번 찍으셨고, 지난주가 세 번째 정기검사였지요?”
“예.”
“아~, 폐에 있는 암 덩어리들이 꽤 커지네요.”
그분께서는 자기 책상 위에 놓인 2개의 모니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얼마... 나... 요?”
“자, 여기, 왼쪽 위에 큰 거…. 한 2cm. 오른쪽 하단에도 한 2cm 정도? 1cm 전후로 읽히는 것들도 꽤 되고요.”
“꽤나요?”
“자잘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분께서는 잠시 말을 멈추셨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마우스패드를 몇 번 두드렸다. 잠시 후 내 쪽으로 회전의자를 돌렸다. 마우스패드 위에 있던 손을 옮겨와 팔짱을 꼈다. 그는 그중의 한 손을 빼내 자기의 턱에 고였다. 그가 다시 말하려는 순간이다. 열리는 그의 입을 보며 난 기시감에 몸서리쳤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교수님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이어서 등으로 의자 등받이를 힘껏 밀치는 듯했다. 그리곤 두 다리를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쭉 뻗는 듯했다. 그의 몸이 드디어 일자가 되었다. 두 팔은 다시 서로가 서로를 안았다. 두 뱀이 서로를 감싸듯 그렇게. 그의 들숨과 날숨이 그의 상체를 앞뒤로 리듬을 타듯 움직이게 하는 듯했다. 산에 둘러싸인 조그만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미풍에 날려 가장자리를 달래 듯이, 그러다 그는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팔짱을 풀었다, 동시에 그의 짧았지만 팽팽했던 침묵도 풀렸다.

“이 상태로는 안됩니다.”
“예?”
“이런 상태로는 힘듭니다.”
“힘들어요?”
“예.”
“뭐가요?”
“오래 버티시는 게......”

"오래 사는 게 힘들다...? 오래 사는 게 힘들다..."
난 순간적으로 속에서 그 두 문장을 반복했다.
오래 살 거라는 기대를 접은 지 한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의사 선생님한테 직접 듣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두 번째 병원에서는 메타포였지만,
더 심한 표현도 반복적으로 들었었지만......

“교수님! 그럼, 얼마를 더 살 수 있을까요?”
“......”
“교수님, 맥시멈-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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