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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늦을 때란 없다

90세 넘으신 할아버지와 멀리 떠나는 20세 손녀

by 힐링미소 웃자 2023.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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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아버지와 1박 하고 왔다. 10일 사이에 두 번을 뵀다. 많은 즐거운 순간들을 가졌다. 아버지께서도 많이 즐거워하시는 것 같았는데, 그중 손녀랑 함께하시는 시간에 더욱 흡족해하시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엔 전보다 더 자주 어두운 그늘이 보였다. 얼굴도 수척해지신 듯했다. 걸음걸이도 열흘 전보다 더 힘없어 보였다. 식사 잘하시고, 쾌변을 보신다 하셨지만,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걱정이 앞선다. 고향집 방문은 기쁨만큼 아픔도 함께 한다. 그래도 한 번 더 뵌 것은 잘한 일이라 자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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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든 안 묻든 당신께서는 절대 요양원에 안 간다 하신다. 나 또한 권해드린 적 없다. 그러나  방문요양보호사를 몇 번 권해드린 적은 있었고, 이번에도 넌지시 말씀드려 봤다. 한 문장으로.
 
"걸음걸이가 더 불편해 보이시니 빨래나 청소만을 위해서라도 요양보호사를 한번 써보시는 건 어떠세요?"
 
아버지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직 나 혼자서 할 수 있다."
 
주변의 많은 분들께서도 또한 요양보호사를 권하신다. 하다못해 밥과 설거지만이라도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한번 써보시라는 게 요지다. 결국 요양보호사 일을 하시는 막내 숙모님께서도 나서신 적이 몇 번 있다고 했다. 현장에서 다른 분들을 위한 요양보호를 위해 일하시는 마당에 시숙도 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말씀을 하시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냐! 그러나 아버지의 답변은 한결같다고 하셨다. 

 

"아직은 아닙니다."
 

 

어제도 당신의 손녀딸과 같이 뵀다. 그 손녀딸이 조만간 먼 곳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그걸 아쉬워하시면서 손녀가 떠나기 전 두어 번은 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아버지께서 조심스럽게 한번, 지나치듯, 말씀하셨었다. 나도, 딸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래서 토요일 일찍 내려가서 일요일 올라왔다. 

 

일요일 아침은 갑작스러운 삼겹살, 소고기 스테이크로 작은 상이 넘쳐났다. 손녀딸 잘 먹는다고 아버지께서 그 비싼 소고기를 또 사셨기 때문이다. 아침으로 기름기 줄줄 삼겹살을 먹는다는 것, 나로서는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딸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시는 아버지 표정에 마음은 즐거웠다. 

 

 

점심은 중국집에서 함께 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는 그 존재 자체를 몰랐었고, 국민학교(초등학교) 땐 동경했으며, 중학교 1학년 때(내가 다니던 중학교 교문 바로 앞에 있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먹어본 적 없었었기에)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짜장면, 그걸 다 큰 성인이 된 40대 초반에야 아버지와 처음으로 함께 했었던 짜장면이다.

 

그 후로 아버지께서 짜장면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를 알고는 자주 함께 하곤 했었는데, 어제 손녀딸과의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점심도 짜장면이 있는 중국집에서 했으면 하시는... 은근히 원하시는 듯했다. 물론 그 중국집에는 다른 많은 비싼 메뉴들도 있기에 짜장면에다가 값비싼 요리들로 큰 상 차려 손녀딸이 맛나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셨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딸은 양이 적은 편이라 짜장면 한 그릇도 다 못 비운다.

 

 

그렇게 짜장면을 유별나게 좋아하시는 아버지께서는 몇만 원이나 몇십만 원짜리 상차림보다는 8,000천 원짜리 짜장면 한 그릇, 아니면 간짜장에 단무지 몇 개와 양파 몇 개가 전부인 상차림을 더 맛있어하시는 듯하다. 비싼 상차림으로 모신다 한들, 밥과 제육볶음에만 젓가락이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게 전부다. 나머지 그 많은 반찬들은 아버지 젓가락을 한 번도 못 만난다. 그러니 당신이 좋아하시는 음식으로 손녀와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식사를 하시고 싶은 건 말이 되는 일이다.

 

내가 말리곤 하는, 아버지의 요즘 후렴구를 손녀한테 또 하시면서 맛있게 한 그릇을 비우셨다.

 

"내 생전에 언제 또 너랑 밥 같이 먹겠냐! 맛있는 거, 좋아하는 거 다 시켜라. 이건 할아버지가 살게." 

 

지난번엔 손녀딸이 계산했었는데 그걸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신 듯했다. 열흘 전 점심도 같은 중국집에서 했었는데, 그날 점심값을 알바로 범 돈이 있다며 손녀딸이 내고 싶다고 했었다. 딸은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2년간이나 쉬지 않고 주말 알바를 해오고 있었다. 지난번 고향집 방문이 평일에 이뤄졌던 이유이기도 했다.  어쨌든 딸은 대학생이 된 후 한 번도 쉰 적 없던 주말 알바, 그것 없는 온전한 주말을 엊그제가 돼서야 비로소 만끽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헤어지며 또다시 본 아버지의 그을린 얼굴과 여윈 모습, 더 굽은 등을 보며 착잡함, 아쉬움, 아련함,... 그런 온갖 슬픈 표현들만 떠 올랐다. 91세시니 어쩌면 동네분들 표현이나 당신의 입버릇처럼 장수하시는 건지도 모를 일이지만, 내겐 아픈 모습들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딸은 지난번에도 그랬었지만 엊그제도 운전을 도맡아 했다. 딸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서, 그것도 조수석에 앉아서, 능숙한 운전솜씨를 뽐내는 딸의 모습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달콤하고,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즐거운 순간들이었다. 얼마 후면 물 설고 낯선 곳으로 멀리 떠나는 딸을 위해 밤낮으로 기원한다. 내가 틈만 나면 말하곤 하는 것들, 그것들을 마음속으로 다시 되뇌었다.

 

그저 건강하기만을,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즐거운 순간들을 많이 갖기를... 되도록 많은,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기를... 존재만으로도 내겐 너무도 가슴 벅찬, 소중하기만 한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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