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은 나에게 아주 특별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특별하다’는 말은 그런 경우에 쓰는 말은 아닐 듯하다.
다른 표현을 찾아내기 위해 좀 더 머리를 써서 궁리하자면, 오히려 ‘상상 그 이상’, 아니면 ‘ 절망의 저편’이었다고 말하는 게 당시의 느낌에 더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그랬었지만 정신적으로도 그랬다. 돌이켜보면 그해 여름 이전까지는 예행연습, 아니 ‘예방주사’에 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2016년 막 여름이 시작되던 6월 초입에 청천벽력과도 같았던 진단을 받았었다.
"환자분은 다리를 잘라야겠습니다."
"예?"
"전이된 부위가 광범위합니다."
"그래도 제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살릴 수도 있을 것처럼 말씀하셨었는데요......."
"그래요? 아닙니다. 살리지 못합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진료실 창밖을 멍하니 쳐다볼 뿐 그 밖의 어느 것도 할 수가 없었다.
3주간을 밤낮으로 거의 누워있다시피 한 덕분에 이식한 다리가 잘 고정된 상태로 보인다는, 엑스레이 사진에 대한 설명을 다 들은 후, 나는 담당 간호사에게 물었었다.
“그런데 선생님, 저 정도면 장애 등급이 얼마나 나올까요?”
“장애등급요?”
“네.”
“환자분은 장애등급이 안 나올걸요?”
“예?”
“......”
“저 같은 사람이 안 나오면 누가 나와요? 위아래 관절 부위만 남기고 잘라냈고, 사이즈도 완전히 다른 뼈로 이식한 데다가, 티타늄판 두 개에다가 나사못만 해도 17개나 박혀있잖아요?”
“환자분, 이런 수술받는 사람들 좀 계십니다만......”
“계십니다만?”
“하지만 장애등급 나오는 분들은 얼마 안 계십니다.”
나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걷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장애 등급이 안 나올 수가 있다는 말인가?”라고, 되뇔 뿐!
달리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뒤바꿀 수는 없었다.
“환자분, 우선 정형외과 교수님이 회진 오시면 다시 한번 물어보시는 걸 어떨까요?”
“예.”
나는 수술을 담당했던 교수님이 빨리 회진 오기만을 기다렸다.
옆 병상의 시골 할아버지도 피곤함에 지쳐 잠들 무렵, 그 교수님이 휑한 두 눈을 전등 불빛을 반사하는 안경 렌즈 너머로 감춘 채 내 곁으로 왔다.
“교수님, 저 퇴원할 때 장애등급 신청 좀 할 수 있는 준비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그 교수님은 의외의 질문이란 듯 미간을 올렸다.
“하, 그게 쉽지 않을 텐데요.”
“왜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심의 위원회가 생각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병원에서 머무른 몇 주를 뒤로한 채 퇴원을 한 후에도 나는 정기적인 정형외과 진료가 있을 때마다 장애판정에 대한 요청을 거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답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무더운 여름 내내, 그리고 열기에 지친 여름을 물리친 가을이 올 때까지도, 낙엽에 미끄러진 가을이 낚아챈 겨울의 손을 놓치고 굴러 떨어질 때까지도 나는 잘려 나간 한 토막의 원래의 뼈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보냈다.
‘실질적 장애인’의 상태였었음에도 ‘법적인 장애인’은 아니었던 상태에 있었던 나는 합리와 불합리에 대한 고민으로 그 긴 시간 동안 육체와 정신을 몰아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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