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로 살다 보면, 때론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경우가 그리 흔한 건 아니란 사실이다. 만약 그게 흔한 경우에 해당한다면 너무 억울해서 못 살 듯하다.
암환자에겐 이기적 유전자가 많을까, 아니면 이타적 유전자가 많을까! 웃긴 질문이긴 하다. 사실 암세포가 온몸을 장악하고 있는 4기 암환자 입에서 나올 자문자답은 더더욱 아니다. 이타적이건, 이기적이건 어쨌든 어떤 면에서는 오염된 세포들이고, 유전자로 따지자면야 그보다 더 순수하지 않은 DNA가 또 있을까만은.
암 진단 후, 그것도 암이 폐로도 부족해서 육종성 변이를 일으키고 결국은 다리로 가버렸고, 그쪽 다리뼈를 잘라내서 장애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시기,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을 위해 호의를 베풀었었다. 그는 커피 머신 사업의 초기 단계에 있었다. 그는 기계적 재능 내지는 소질은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지금도 그런 것처럼 보이고.
당시 그가 커피 머신을 만들기엔, 내가 보기엔, 핵심적인 부품을 조달한 능력이 없는 듯했다. 조달이다, 구입이 아니고. 뭐 자재를 들여다가 국내 제조업자들에게 파는 사람들, 오퍼상이라 불리든, 수입업자라 불리든, 그런 사람들은 많다.
문제는 폭리다. 내가 직접 경험해 보니 대략 20배까지 남겨먹는 사업자들도 많았다. 세상에! 였다. 그런 폭리가 또 어딨을까. 그런 업자들이 한 둘이 아녔다. 요즘은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그런 부픔들 수입해다가 써봤자 남는 게 별로 없다. 그의 사업은 만들어 팔아봤자 남는 게 없는 구조였다.
그의 사업구조는, 당시, 그 많은 걸 만들어봤자 모두 국내 기업에서 소화해야 할 형편이었다. 왜? 해외 거래처가 없으니. 그의 사업구조는 간단했다. 관계가 그랬다는 것이다. 다른 회사 제픔, 부품을 사다가 서비스했다. 그런 관계가 몇십 년은 된 듯했다. 그렇게 사업 인맥을 만들었으니 일견 그들한테 시네를 많이 졌었음은 말해 뭣하랴!
다른 각도에서 그의 사업을 보면 꼭 먹이사슬 같아 보였다. 부스러기 떨어진 걸 받아먹는 구조? 그런 구조처럼 보였다. 그쪽에서 물건을 안 주면 못 팔아먹고, 부품을 안 주면 팔아먹은 제품에 대한 서비스가 안 되는 구조였다.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 할 사업관계는 아닌 듯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는 그 자존심이 엄청 강한 사람 중에서도 좀 극단적인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가 내게 고백한 말에 의하면 당시 그런 관계의 청산이 절실했다. 나이도 50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다. 손에는 언제나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그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닥, 그럴 나이가 됐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시점에서 딱 내가 오도 가도 못할 암 4기 보행 장애인이 된 것이었다. 그런 내가 필요했던 가 보다. 영어깨나 하는 사람, 외국 친구가 있는 사람... 그러나 얼마 못 살 사람. 어쨌든 그는 사람은 잘 골랐었다. 나를 골랐으니...
그가 내게 말한 비즈니스 모델은 이랬었다. 기존 사업은 지속한다. 캐시카우가 어쨌든 있어야 하니. 그런 돈이 있어야 다른 사업을 하든지, 신사업이 잘 안 되더라도 메꿀 돈이 필요한 게 뻔했으니. 아닌가? 소위 헷지란 게 뭐 별 건가!
그래서 그의 사업의 종착역은 해외 수출이었다. 부픔도 해외에서, 오랜 기간 공생관계였던 몇몇 회사들, 그들과 관계도 끊고, 만든 제품을 100%로 해외로 수출하는 거였다. 해외시장 개척은 내 몫이라고 그는 말했었다. 기왕의 나의 해외 인맥, 그리고 영어 잘하는 나의 전시회나 박람회 참여 등을 포함한 개척.
그런 과정 중 신제품 중이 30%는 그 공생관계를 통해서 소화시키고, 나머지는 해외에, 그리고 내겐 국내 및 해외 대리점권을 주겠다... 뭐 그런 구상처럼 들렸다. 영악한 것이다. 그는 물론 내게 누구와도 나눠먹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분명히 말했다. 사업을 나눌 생각이 절대 없다고. 나를 겨냥한 말임이 분명했다. 내가 무슨 역할을 하든 철저하게 보조나 직원에 불과할 거란 선언이었다.
어쨌든 그는 내게 부품 조달을 부탁했고, 난 웹 서핑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어디선가 구해온 카탈로그를 보여줬다. 그러면서 여기저기 찾아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 논문 쓸 수준은 아녔지만 영어라면 한 영어 하는 나였다. 자뻑이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국 회사도 접촉해봤고, 당연히 중국 회사도 접촉해봤다. 거기서 멈춘 게 아니라 에스프레소의 본고장 이탈리아를 제칠 수는 당연히 없는 일이었다. 이탈리아에 있는 이 회사 저 회사를 찾았다. 그 화사들 홈피를 다 들어가 봤다. 그 회사 제품들도 다 들여다봤다. 이메일도 보내보고 국제전화도 해봤다. 한국과 이태리는 7시간의 시차가 난다. 거기가 출근시간 9시라면 여기는 4시다. 끼 퇴근시간 5시면 여기는 한밤중 12시다.
거기서 점심 여유 있게 먹고 3시에 전화하면 여기는 밤 10시란 뜻이다. 거기서 퇴근하다 전화하거나 급하게 이멜로 뭘 물어오면 난 밤 11시나 12시에 응답해야 했다. 음... 국제 업무는 그리 녹록한 건 아니다. 내가 그 짓을 아주 많이 했었다. 7개국에서 원어민 강사를 데려와야 하는 역할을 한 적이 많았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은 그런 짓으로 먹고살았었다.
E2 비자 나오는 나라는 정해져 있다. 미국, 캐나다, 영국, 아일랜드, 남아공, 호주, 뉴질랜드다. 물론 인도도 포함된다. 하지만 거기 출신은 영어를 전공해야 한다. 아, 물론 중국어 학습 보조교사를 하려면 중국 대학을 나온 인력이 물론 필요하다. 어쨌든 중국을 제외하고 원어민 강사들을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라서 내겐 국내 헌팅과 다를 게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태리 피자와 스파게티, 파스타 같은 것과 같이 묻어왔을 찐 이태리 맛 안 본 유럽인들이 얼마나 될까? 로마 아래 숨죽이며 살았던 민족이 하나 둘이련가. 게다가 내겐 이태리계 미국인 친구가 있었다. 지금도 믈론. 그런 문화적 배경과 거의 25년을 형 아우 하며 보냈으니 내가 이탈리안의 특성을 모를 일이 있었을까!
'삶 > 소수자로 산다는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암 환자도 소수, 장애인도 소수: 암과 장애인에 대한 기본 개념 (0) | 2023.05.22 |
---|---|
암으로 죽을 확률 관련 (0) | 2023.04.17 |
세계 여성의 날 (0) | 2023.03.08 |
키에 대해서 2: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것의 유리함 (0) | 2023.01.15 |
키에 대해서1: 상대적으로 더 큰 키를 위하여 (0) | 2023.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