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을 소식지가 나오는 날이다. 이번 달엔 그 부수를 늘렸다. 후원하는 쪽의 사정으로 이번 호가 올해 마지막이 될 듯해서였다. 그쪽도 자기네들 돈으로 하는 건 아니다. 서울시와의 협약에 의해 지원받는 돈이다. 그렇든 아니든 모두 국민들이 낸 세금이다. 그 국민들의 대부분은 지역사회의 사회의 구성원들이고, 우리와 같은 정체를 가진 국가들에서는 주권의 원천이라고 한다. 그러니 주민들과 함께 마을 소식지를 내는 것은 한 명의 주민으로서 의미가 있는 행위다.
난 내가 사는 동네를 좋아한다. 나뿐이 아니고 샛별도 좋아한다. 이 아이는 여기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나보다 더 좋아하는 듯하다. 난 고향을 말할 때 충남 어느 군을 말한다. 친구들과 대화할 때 난 ’깡촌 DNA 결집체‘라고 말하곤 한다. 물론 태어나서 중2 때까지만 내가 태어난 마을에서 살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곳은 내 정서의 근원이다.
내가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4기 암 환자에 더해서 여기저기 전이도 부족해 뼈 전이가 재발한 형국임에도, 내 마을이 좋아지면 그 속에 사는 나의 생활의 만족도가 높아지고, 내 딸의 주거 만족도가 높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와 내 가족, 이웃 생활의 만족도를 높이는 일과 우리 동네가 발전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게 내 믿음이다. 그 일을 멈출 수 없는 것의 이유다.
내가 이번에 아주 많이 놀라고 실망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는 딸아이와 관련돼서다. 샛별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암 진단받았다. 이제 대학생이다. 아빠란 존재, 같이 놀아주고 대화하고...그런 아빠의 역할이 한참 필요한 세월, 난 그렇게 못했다. 그 미안함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 딸이 내년에 멀리 유럽으로 유학 가기로 결심했다고 올여름 초입에 내게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딸이 유학을 결정한 국가, 그 나라엔 나의 30년 지기 친구가 있다. 바로 옆 나라에도 역시 30년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 우정을 간직한 친구가 있다.
내년 여름의 초입에 딸이 그 나라로 떠날 때, 나도 함께 가기로 했었다.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질 동안, 대략 한 달여를 함께 있고 싶었다. 그곳 친구도 소개해주고 하면서. (그런데 그 친구는 내년 파트너와 함께 한국에 온다. 물론 그때도 소개해줄 예정이다.) 어쨌든 그런 계획이었는데 뼈 전이암이 재발했단다. 더군다나 수술해도 다시 걷는 걸 보장 못하겠단다. 그럼 난 어떻게 비행기를 타고 어떻게 딸의 정착을 도울 건가! 오히려 짐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하니 여간 화가 나는 게 아녔다.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아이가 낯선 곳에서 공부를 시작하는데, 채 한 달 조차도, 부탁하는데도 함께 못 있게 된다면? 같이 있더라도 못 걷는다면? 딸이 떠나기 전 부탁하는 건데 그것마저 못해준다면? 그런 생각을 하니 딸한테 너무 미안하고, 딸 유학 준비에 혼란을 주게 되고..., 그런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그렇게 여러 번 이상신호를 얘기하면서 PET-CT를 찍어 달라고, 그리고 범위를 다리뼈까지 넓혀달라고 그렇게 어필했건만 들어주지 않은 의료진들에게 화가 나고 정말 기분이 말이 아녔다. 한순간에 뒤죽박죽돼버리는 내 삶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더 살고 덜 살고가 아니다. 그건 이미 아주 오래전에 끝낸 고민이었다. 그래서 편지, 엽서, 사진... 다 DVD 2장에 넣었었고, 옷가지들 다 치웠었고...내 몸에, 폐에 20여 개의 암 덩어리들이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아무 이상 없이 잘 관리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딸의 유학길 동행, 그 딸이 사랑하는 마을을 위한 활동, 고향 농사일 경영..., 그런 걸 열정적으로 하던 어느 날, 8.6cm가 넘는 암 덩어리가, 하루 일정 도보량을 유지하는 등 나름 잘 관리하고 있어서 생기는 줄 알았던, 허벅지 근육이라 여겼던 게 실은 거대한 암 덩어리였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 모든 게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너무 황당했다.
차라리 어느날 갑자기, 그저 뼈 전이암이 재달하고 있다거나, 1~2cm 크기라거나, 내가 추적검사에 무신경했었더라면, 추적검사를 의료진들에게 한 적 없다면 이렇게까지 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수술이 결정된 후, 딸아이가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들어오면서,
"아빠! 수술해야 한다고?!'
그 말을 내가 들으면서 느낀 심정은 참 비참함 그 자체였다. 딸은 또 오죽했을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제 다 과거의 일이 돼버렸다. 내 맘이 가는 곳이 곧 집이고, 내 삶은 다름 아닌 오늘에 있다는 걸 다시 되뇌며 일상에 잘, 웃으며 적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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