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기 암 환자인 나는 한때 귀농을 고려했었다. 선대부터 지어오고 있는 농사체가 적으나마 있고, 초등학교 동창들도 몇몇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접었다. 내가 내린 결정이지만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떠나지 않는다. 4기 암 환자, 난 왜 귀농생각을 접었을까?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평화스럽기만 하다. 논도 이제는 쉬어야 할 때란 걸 아는 듯 차분한 브라운 색을 덮고, 물도 하늘로 날려 보내고 드러누워 있다. 그 위엔 래핑 된 볏짚들이 축사로 갈 날만을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다.
조금 전까지 들판에 머물던 일단의 새들이 날아올라간다. 들에서 머물다 날아오르는 걸 보면 가을걷이 때 남겨진 곡식들로 배를 채운 후 인듯하다.
고개를 들오 보니 하늘 위 군무가 화려하다. 군무가 아니라면 뭔가를 불러오듯, 아니면 어딘가 급하게 갈 데가 있는 듯 그렇게 난다.
이토록 평화로운, 어쩌면 풍족한 농촌에 난 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1. 내 고향 농촌은 황량하다. 대농이 이익도 많이 남고... 좋다지만... 덕분에 소농들은 본전도 못 찾아 마을을 떠나 서다. 동네 집들 중 빈집이 반이다. 가장 어린 나이가 이장일 보는 50대 초반 후배다.
2. 선대부터 농사를 짓고 살아온 우리 집은 요즘 규모로 소농에 속한다. 1년 농사 다 해봐야 월 100만 원도 안 나온다. 농약값도 너무 올랐고, 인건비도 너무 올랐다. 그 규모에서 나오는 소출 가지고는 내가 14년째 다니고 있는 병원 가는데 기름값, 휴게소 밥값이나 겨우 댈만할까 말가이다.
3. 결국 비싼 표적항암제 약값이나 큰 수술비는 엄두도 못 낼 소출이다.
4. 더군다나 고향집에서 아무리 이른 아침, 아무리 빨리 차를 몰아도, 이를테면 시속 110km이나 120km로, 병원까지는 3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갑작스레 뭔 일이라도 생긴다면? 아마 길 위에서 죽을지도 모르겠다.
5. 그렇다고 기차를 타고 다닐 조건도 아니다. 집에서 역까지 내 차로 30분, 그런 후 기차로 갈아타고, 역에서 내려 지하철 3번 갈아타면 ktx 할아버지라도 5시간 반이다 걸린다. 다 편도를 말하는 것이다.
6. 내가 만약 부자라면 전날 가서 모텔에서 자고 담날 아침 일찍 병원 가고... 자정 다 돼 고향집으로 갈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반은 죽은듯한 체력이 돼있을 게 뻔하다.
7. 내가 만약 하루에 한두 개 진료과로 끝날 거라면 모르겠지만 한번 가면 두세 개 과를 들러야 한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항암제 부작용, 전이에 따른 여기저기 절제수술 등으로 관련 진료과들이 많다.
8. 난 거기에 더해 지체장애다. 전이된 부위를 잘라내서 그렇다. 몸이 좌우대칭이 아니다. 피곤은 더 쉽게 오다.
9. 더 쓰자면 더 있다...
물론 사랑스럽고 사교적인 들고양이도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대문 앞을 살며시 들여다보곤 하는 길냥이다. 길냥이 같지 않은 깨끗하고 매너 좋은 길양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놈과 대화하며 살 수는 없다. 나 혼자 살아야 하니 말이다. 아, 해가 지기 시작하면 석양이 날 감싼다. 그러나 어둠도 불러온다. 청량한 바람 불어오는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쑤군쑤군, 소곤소곤하기는 하다. 그러나 알퐁스 도테의 별도 하루이틀 밤이지...
아, 화려하진 않아도 소박한 식사는 있다. 내 논에서 난 쌀로 밥을 하고, 내 밭에서 난 배추를 절여, 속을 만들어 밥 한 그릇 후딱 비울 수는 있다. 자급자족경제....
그러나 난, 44기 진행성전이암 환자... 그걸로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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