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창작

관계는 나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by 힐링미소 웃자 2022. 5. 2.
반응형

 

살다 보면 수없이 많은 관계를 맺는다. 진단 전에는 그 관계들은 그냥 관계였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날, 삶을 정리할지도 모르는 4기 전이암을 진단받은 후부터는 그 어떤 관계도 그냥 관계일 수는 없게 되었다. 

 

부모-자식 간 또는 형제 간 관계 등과 같이 유전자를 공유하는 관계, 처음에는 관심과 사랑으로 시작했으나 계약으로 변해갈지도 모를 부부관계, 동성 간이건 이성 간이건 친구 사이라고 불리는 관계 등 뭐라 부르던 나는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근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다. 진작부터 읽고 싶었으나 무슨 꾀죄죄한 책 같아서 미루고 미뤘던 책이다. 최근 부모님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그리고 딸과의 관계를 반추하다 보니... 더 늦기 전에 읽고 싶었다. 

난 사실 암 진단 후 깊이 있는 독서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특히 조금은 무거운 책들에 대해서는 그 부담감이 더했다. 곧 죽을 텐데 그런 걸 읽어서 뭐 하냐? 시나 수필이라면 모르지만, 아니면 암을 이긴 사람... 류의 책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저승길 노잣돈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어봤어도 독서가 필요하다는 말은 나는 들은 적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그러나 독서가 특히 암 환자에게 왜 더 절실한가를 나중에 얘기하고 싶다.)

 

이번 독서를 통해 부모-자식 간, 형제간... 등과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관계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늘어났다. 부부관계야 한때 법에 대한 유별난 관심 때문에 그 계약적 성격을 이해 못 한 바는 아니었다. 오죽하면 점 하나만 찍으면 님이 남이 된다고 했을까!

 

법에 의해 등록된 계약인 부부관계나 법과 관습 전의 동물적, 본능적 단계일 연인 관계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공통적인 것들이 있다. 부부가 되는 순간 생기는 계약관계, 우리 민법에서는 4가지를 논하나 보다. 동거의무-부양의무-협조의무-성적 성실의무(정조의무). 이런 걸 보면 결혼이란 게 사실은 낭만적 연애가 아니라 엄격하고 냉혹한 계약관계란 걸 알 수 있다.

 

연인 관계에서는 무슨 돌발변수가 나타날까? 아마 십중팔구 이게 사랑이냐 아니면 집착이냐 하는 의문이 생기는 순간일 것이다. 첨에야 본능적으로 끌리고, 뒹굴고 하겠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이게 누구에겐 굴레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걸 주변에서 종종 본다. 그래서 난 연애를 싫어한다. 아주 끔찍하게(뭐 그럴 상황도, 주제도 아니지만...)!

 

사랑은 가슴에서 솟아나는 적극적인 감정이라고 한다. 이 사랑이란 건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도 없을뿐더러 희생도 크다고 한다. 이게 자발적이고 본능적이다 보니 보살펴 주고, 지지해 주고, 지원해 주고, 막 공짜로 뭐든 주고 싶어 하는 감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상대가 좋아하고, 행복하면 땡!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 사랑이 범위를 넓히면 이웃에 대하여, 인류에 대하여, 지식에 대하여, 진보에 대하여, 보수에 대하여... 본인의 삶마저 불살라 버리나 보다. 사랑은 그러니 한 마디로, 이타성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집착은 뭘까? 난 이건 한 마디로 제정신 아닌, 정신 나간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물건인 양 소유하려는 감정이고, 한 단계 더 나가 독점을, 그것도 무한 독점을 하려는 불순하고 더러운 의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유욕과 독점욕으로 가는 중간 기착역인 집착은 자유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아니 정반대의 편에 서있는 그 어떤 것, 극히 이기적이고 병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착이 깊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마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유형, 원하는 타입의 사람으로 변하길 원하고, 요구하면서, 그렇게 되도록 조종하거나 지배하려고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테면 그루밍? 가스라이팅? 아니면 그보다 더한 뭐, 이를테면 언어적, 물리적 폭력, 아니면 그보다 더한 것과 같은 그 무엇?... 사랑과 집착은 그 시작은 비슷했을지 모르나 그 결과는, 시간이 갈수록, 극과 극으로 가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도 보아오고 있다.

 

 

꽃말 영원한 우정, 아이비
 
 
친구관계, 또는 우정이란 뭘까? 나의 경우 친구란 관계는 한없이 소중한데, 그 이유의 첫 번째는 편안함이다. 소유도, 집착도, 의무도 없다. 강박도 없고, 압박도 없다. 오늘 보고 싶은데 상대방이 시간이 없으면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을 만나 여행을 하고, 밥을 먹고, 시간을 같이 보내도 질투가 안 생긴다. 또 내가 누구와 있고, 뭘 하는지 끔찍할 정도의 심문을 받지도, 하지도 않는다. 자유다.

 

또 내가 뭘 같이 먹자고 하면, 기꺼이 지갑을 연다. 또 내 몸이 항암제로 힘들어할 때면 귀 기울여 듣고, 위로를 해준다. 내가 그 친구(들)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을 때면 자존감이 더 커간다. 암에 버티고, 맞설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온다. 

삼선짬뽕, 신선한 해물과 야채가 듬뿍 들어가고, 여러가지 재료들로 국물을 낸 삼선짬뽕은 내게 진리다. 항암제로 인한 설사 땜 자주는 못 먹지만...어쩌다 한 번 먹을라 치면 구름 위를 나는 것 같다. 거기에 친구라도 한 명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절친과의 우정은 시간을 초월한다. 내가 며칠 만에 전화해도, 몇 달 만에 소식을 전해도, 몇 년 만에 인사를 해도 서운해하거나 나무라지 않는다. 그리고... 어려울 때 같이한 친구는 더더욱 그렇다. 더 이상 밑으로 내려갈 일이 없는 내 모습을 보고도 옆에 머물렀으니 다시 더 밑으로 떨어질 일 없는 지금의 나를 보고 실망할 게 또 있을까! 

 

난 암 4 기다.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다. 폐로도, 다리뼈로도 갔다. 콩팥은 하나를 잃었고, 폐도 4분의 1을 잃었다. 다리뼈도, 제일 강한 뼈 한 토막, 잃었다. 또 몸 어디로 퍼지고 있는지 감도 못 잡을 일이다. 지팡이를 짚으며 걸음을 뗀다. 좋아했던 달리기도 못한다. 장애인 등록증을 5년 전에 받았다. 머리는 항암제 부작용으로 새하얗다. 나이는 먹어 가고 있다. 죽음이 언제 내 곁에 올는지 모른다. 오늘 밤일지, 낼 아침일지, 열흘 후일지, 1년 후일지...

 

그러나 친구는 내 곁에 머문다. 독점도, 요구도, 집착도, 보채지도 않고 말이다. 난 꿈 꾼다. 세상의 모든 부모-자식이, 형제가, 연인이, 부부가... 친구처럼 되길... 

 

서로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는 걸 바라지 않고, 그가, 그녀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길 원하거나 요구하지 않으며, 독점하지 않으며, 항상 관심을 가지며, 힘들 때 위로해 주는, 그것으로 내가 이 세상은 아름다우며, 좀 더 머물만한 곳이고, 나 또한 그런 존재가 되리라고 다짐할, 그래서 내게 자존감을 주는, 나도 그에게, 그녀에게 자존감을 주는 친구 같은 관계들을 꿈꾼다.

 

#리처드도스킨_이기적유전자 #집착과사랑 #사랑과집착의차이점 #아이비꽃말 #집착은사랑인가 #사랑과집착은같은가 #법적계약관계 #부부는법적계약관계 #부부의4대의무

반응형

' > 창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언의 말  (0) 2022.05.27
단순이 그립다  (0) 2022.05.26
무조간만남_딸과의 돌발적 조우 1-예감  (0) 2022.04.25
오는 듯 가는 듯  (0) 2022.04.16
바람에 맘을 씻고  (0) 2022.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