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내가 오리건을 떠난 날, 그날을 기념해 백세주 드시는 그 프랭크란 형님은 나보다 대략 20~30살은 더 드신 양반이다. 이때리 혈통이라서 성도 전형적인 이딸리안이다. D’로 시작하는 걸 보니 말이다. 할아버지 때 대가족이 아메리칸드림을 좇아왔다 했다. 이 형의 아버님이나 어머님은 그러나 아메리칸은 됐어도,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신 것 같지는 않다. 이 형 말을 들어보면 말이 아메리칸드림이지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던가 보다.
이 형의 아버님 대신 삼촌은 나름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신 듯 들린다. 한 가지를 빼놓으면 말이다. 이딸리안들은 전통적으로 대가족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형 삼촌네는 전혀 대가족이 아니었다 한다. 어쨌든 나름 아메리칸드림을 이뤘으니 이 형을 대학까지 가리키실 수 있었으리라.
아주 질좋은 교육을 받은 이 형은 키워주신 작은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이 얼마나 크다고 여기는지 그분들 말을 할 때마다 운다. 예나 지금이나 낳은 정보다는 키운 정이라고들 한다더니, 이딸리안들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이 형은 대학 중 군에 갔고 훈장 비슷한 뭐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형은 그 군대 추억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데, 제대할 때 갖고 나온 소지품들도 신줏단지 모시 듯해서 현관을 들어와 접견실로 들어가면 유리로 된 군대 물품 전시용 가구가 있을 정도다. 그런 소중한 물건들을 한참 동안 블라블라 설명하더니 하나 가지려나 물었었다. 하지만 내가 어찌 소증한 추억이 깃든 물품을... 언강생심! 그런데, 2019년 10월, 그 형 집을 떠나올 때 그들 중 하나인 공군 모자를 내게 선물했다.
이 형은 카톨릭계 유치원 비슷한 곳부터 시작해서 카톨릭계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그런 후 공인회계사가 됐고 밥벌이로 아주 오랫동안 그 직업과 함께 했고, 지금도 그 비슷한 일로 용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한 때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하나, 런던에 하나, 그렇게 2개의 회계사무소를 둘 정도로 벌이가 좋았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필라델피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오랜기간 오가는 게 여간 뭐한 게 아니었다 한다. 몸이나 부부관계 등에 있어서.
나중 이 형은 뉴욕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보이고, 거기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월스트리트 끝에 위치한 빌딩에서, 그것도 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층에서 비서를 두고 일했었다 한다. 내가 2010년엔가 뉴욕에 갔을 때, 자기 사무실 쪽 거리키며,
“한번 올라 가볼래?”
그랬었지만... 뭐 굳이...
거기서 당시에 그 형은 벤틀*라고 하는 다국적 회사의 이사진, A Board Member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 형을 만난 후 한참 지나서 급작스레 한국에 온 적이 있는데, 한국 지사 설립을 위한 스카우터 모집 건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때 그 형한테서 세 번이나 제의받았었는데... 인생 기회 삼 세 번이라고들 하는데, 한 번 받아볼 걸 할 때가 몇 번 있었다. 나중에 그 한국지사 멤버들 몇 번 만나 밥도, 술도 먹었었는데... 그 맨파워에 그리 큰 전망을 느낄 순 없었다.
어쨌든 그 형은 필리-뉴욕-필리, 그렇게 동부 대도시들을 거점으로 오랜 세월 생활하던 걸 끊고 서부 산골 촌구석으로 들어갈 전기가 생겼었는데, 그 원인들 중의 하나가 내가 암환자였다는 것, 그것도 포함된다고 했다. 무슨 나비의 날갯짓 같은 이야기다.
'삶 > 늦을 때란 없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4기 암 환자 지역사회 데뷰-인사동 나들이 1 (0) | 2021.11.11 |
---|---|
너무 늦을 때란 없다-백세주 미국 형 얘기 2, 여친의 건강문제 (0) | 2021.11.07 |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이유 (4) | 2021.10.04 |
동네 유지 모임에 꼽싸리 낀 4기 암 환자-반기 (0) | 2021.09.14 |
500만가지 색과 1조개의 냄새와 암 환자 하루라도 더 사는 비법 (0) | 2021.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