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암이 있었다. 이미 폐로 전이된 상태의 4기 암 진단을 받았었다.
폐로 전이된 신장암_개복수술
병원을 옮겼었다. 거기에서도 진단은 같았었다. 단지 사이즈가 달랐었다. 수술방법도 다빈치라는 로봇수술에서 개복수술로 변경되었었다. 콩팥과 그 위에 붙은 부신을 뗐었다. 그 후 거의 2년 동안 검사만 진행됐었다. 그사이 폐로 전이돼 있던 암의 사이즈는 커져만 갔었고, 개수도 첨단의료기기에 보이는 것만도 20여 개가 넘는다고 했었다.
신장 수술 후 병원 옮기다
다시 병원을 옮겼었다. 그곳에서는 적극적이고 실험적인 대처를 제안했었다. 근본적인 치료방법은 없다고 했었다. 우선 폐에 있던 전이암 덩어리들을 할 수 있으면 다 떼어내 보자고 했었다. 그런 내용이 내 폐를 수술할 흉부외과로 넘겨졌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두 번의 거절을 했었다. 불완전한 방법일뿐더러 폐를 헤집는 수술로 인한 건강상의-삶의 질의 관점에서-피해가 암 덩어리들을 놔두는 것보다도 더 크다 했었다. 그러나 나의 주치의 선생님은 다시 한번 의뢰를 넣었었다.
폐 3엽을 절제하다
흉부외과에서는 나의 폐 여기저기에 있던 전이 병소들을 제거하는 대신에 폐의 3 엽을 완전히 절제하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했다. 거기에 가장 큰 3개의 암 덩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더군다나 그놈들이 가장자리 쪽이 아닌 입체의 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똑 떼어내는 건 불가능했을뿐더러 효용성도 없어서 그랬다 했다.
폐는 5개의 엽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그중에서 한 개의 엽을 제거했으니, 이제 폐에 남은 건 4개의 엽들이라고 했다. X레이를 찍으면 한쪽의 폐는 다른 쪽과 비교해서 거의 반이 없어진 상태였다. 물론 20여 개에 달했던 CT상의 암 덩어리들의 숫자에 큰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여전히 20여 개 정도라고 노련한 노교수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어디 세상일이 사람 뜻대로 되나!”
폐 절제 후 표적항암제 권유받다
나는 폐 수술을 마친 후 표적항암제를 권고받았다. 나의 주치의께서는 차선책이라고 했고, 큰 기대는 하지 말라는 말도 빼먹지 않고 했다. 4기 암은, 특히 신장암은 이러저러한 항암제에 반응을 잘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방사선에도 강하다고 말했다. 특히 표적항암제에는 내성이라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화학 항암제에 비해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적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먹게 될 표적항암제는 간독성이라는 치명적 부작용이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런데도 나의 나이가 상대적으로 젊을뿐더러 혈액검사의 결과를 보면 견딜 만할 거라고 격려했다. 마지막으로 신약이 많이 나올 거로 예상되니,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말씀하시며 용기를 주었다. 거의 1년 반에 걸쳐 표적항암제를 복용했었다. 그토록 길게 그 약을 먹는 경우는 드문 경우라 했다. 또한, 상대적으로 부작용도 그렇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라 말했다. 그러니 약을 중단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완전관해 판정 받다
내가 약을 먹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암 덩어리들이 소멸하고 있다고 말했었고, 일 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는 거의 완전 관해가 현실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용량에 신축적인 변화를 주긴 했었으나... 한 번도 중단한 적이 없었던 약을 마침내 끊게 되었었다.
기쁘고도 놀랍고 새로운 환경에서 난 하늘을 나는 듯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기검사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이 가슴(흉부)과 복부 CT였었다. 각각의 결과마다 좌절을 불러올 정도의 나쁜 소식은 없었었다. 그저 폐 전이암들이 아주 약간씩 커지고 있지만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렇게 약 없이 대략 1년 반이 흘렀었다.
기분 좋은 분위기, 그런 꿀 같은, 아니 꼴 보다 더 달콤한, 시간을 보내며 희망찬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웠었다. 여전히 술 담배는 하지 않았다. 친환경 식품을 먹으려 애썼다. 아침저녁으로 운동도 쭉 했었다. 그러면서 기지개를 켜듯 나의 온몸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활성화하고 싶어졌다.
상처 난 몸과 놀라고 분주했던 마음을 다독이고 싶었다. 그 둘에게도 보상이란 걸 해주고 싶었다. 힐링! 그래서 많은 것들 중 요가를 하고 싶어졌다. 비싼 돈을 주고 요가 앱을 스마트폰에 깔았다. 차분한 음악을 들으며 몇 주간에 걸쳐 초급단계를 끝냈었다. 난이도를 높이며 중급으로 막 들어갔다. 요가는 참 좋은 거라고 느꼈고 그 맛을 즐기고 싶었다.
완전관해 판정받은 후 벌써 1년이 지나고... 다음 해 봄이 지났고, 초여름이 막 내 몸을 에워싸며 열기를 품기 시작했다. 요가도 이제는 중급과정, 기쁜 맘으로 중급 여러 단계들 중 첫 번째 단계를 따라 다리와 팔을 좀 더 비틀게 되었었다.
그때가 2016년 초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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