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번호로부터 걸려 온 전화
내 스마트폰 화면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듯한 전화번호가 떴다. 국번은 내가 다니고 있는 병원이 분명했다. 그러나 뒷번호는 낯설었다. 요즘 모르는 번호, 무심결에 받으면 패가망신할 수도 있다는 보도를 접해오고 있는 나다. 없는 살림에 4기 암 환자 주제인 내가 신불자라도 되는 날엔 인생 참 최악의 비참함이란.... 그런 생각도 순식간에 들었었고 또 오래간만에 맛보는 뚝배기 된장찌개와 돌솥밥! 그게 통화 땜 식어서... 식도락을 방해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벨이 서너 번째 울릴 때 왠지 꼭 받아야만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난 통화버튼을 눌렀다. 스피커엔 아주 낯익은 저음의 목소리가 내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거의 11년째 들어오고 있는 목소리였다. 첫 문장은 짧았다.
"ㅇㅇㅇ입니다."
"앗!"
전화번호의 주인공, 주치의
전화번호의 주인공은 내 주치의 교수님이었다.
"이분... 어제가 휴가 후 첫 번째 진료일이었고... 오늘 또 무척 바쁘실 텐데..."
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은 다르게 나왔다.
"교수님, 언제 돌아오셨는지요?"
"아, 어제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어제 차트를 봤습니다. 정형외과 교수님 의뢰의 MRI 검사 결과를 봤습니다."
“네... 저도 엄청 놀랐습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엔... PET을 찍었을 때 (영상의학과 쪽에서) 아마 염증 소견으로, 그러니까 염증과 암 활성화를 혼동한 듯합니다."
"......"
난 침묵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내 맘 속엔 항의가 머물고 있었다.
"(아니, 여기 병원이 어딥니까? 한국 최고의 병원이란 데가 아닌지요? 영상의학과란 곳에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판독하길래 염증과 암 덩어리를 혼동합니까? 이건 완전 판독 오류가 아닌가요? 제가 본 스캔 후 진료시간에 잘라 낸 부문 밑에 보였던, 까많게 보이는 것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납득을 못하겠다며 세 번씩이나 의문을 표시했었는데, 어떻게 이 정도의 크기로 자랄 동안...)"
의료진 실수 내지는 태만을 암시하는 나의 메타포
난 그날 정형외과에서, MRI 검사 영상을 보면서, 얼마나 놀랐었는지, 정형외과 담당의께서도 순간 얼마나 경악스러운 반응을 나타냈었는지를 말씀드렸다. 이어서 그날 정형외과 교수님께서는 절제 후 남아있던 부분, 그러니까 충분한 범위를 절제한 게 아니라 부분절제라는 실책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표현을 부지불식간 하셨다는 점, 아니면 전이암 세포가 몸속을 빙빙 돌다가 거기서 정착했을지도 모른다는 표현도 하셨다는 것 등을 말씀드렸다.
주치의 교수님의 제안, 방사선 치료
교수님은 나의 항의성 표현들을 묵묵히 듣고 계셨다. 난 사실 긴 말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원망스러웠기에 말을 더 하면 좋은 표현들이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일단 진료시간에 좀 더 명확한 질문과 의사표현을 하기로 결심하며 입을 닫았다. 내 말이 거의 끝날 무렵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제가 어제, 차트를 보자마자 방사선종양 쪽 ㅇㅇㅇ교수님께 연락을 드려 상의했습니다. 낼 제 진료가 끝나는 대로 그 교수님을 만나실 수 있도록 조치해놨습니다. 우선 방사선 치료를 신속하게 시작해보기로 했으면 하는데, 어떠실까요?"
" 방사선 치료요?"
"네."
"비뇨기 관련 암종들은 방사선이 안 듣는다고, 첨 뼈 전이 때 말씀하셨었는데..."
"벌써... 그게 6년 전이고... 의학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 해보자! 그런 조언을 주시는..."
"네. 그렇습니다. 모든 조치를 다 해놨으니 한 번 해보시지요."
"네......"
나의 질문, 방사선 치료 후 예후와 수술 가능성
난 이 교수님을 존경한다. 실력도 있으시고, 환자와의 소통을 중시하신다. 온화하시다. 논문도 활발하게 발표하신다. 내가 알기에 이 분께서는 스탭들의 의견도 중시하신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나한테 들이신 정성이시다. 이 점은 여기 블로그나 저기 블로그에 이미 충분히 썼다. 그러나 내 케이스 관련, 여러 번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를 취하신 적도 물론 있다.
난 여쭸다.
"교수님, 그 방사선 치료 후 예후는 어떨까요?"
"글쎄요. 우선 과정이 끝나 봐야 리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교수님, 방사선 치료 과정 후 수술이 가능할는지요?"
"글쎄요... 그건 해당 진료과 교수의 말을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겠군요. 그럼?"
"우선 진료 시간에 뵙지요."
"제가 교수님과 방사선과, 정형외과에 새로운 의학적 데이터를 제공하겠군요."
"......"
"교수님 이것저것을 떠나 휴가 끝나고 복귀하시자마자, 그리고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전화 주시고, 제 긴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방사선 치료를 받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직접 담당 교수님과 세팅까지 끝내주시고...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너무 안타까운......"
"네. 낼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난 그렇게 초고속으로 주치의 교수님의 진료를 받게 됐다. 이건 나의 어필만으로는 안 될 문제였다. 긴급성 내지는 그 어떤 의학적 이유 때문일 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진료과 의료진과 교수님 간에 휴가 중임에도 나와 관련된 사항들이 전달됐고, 그걸 교수님께서 인용하셨을 거라는 것은 합리적 추론일 것이다. 어쨌든 초고속 주치의 교수님 진료를 넘어, 나를 위한 방사선 치료까지 세팅되는 걸 경험하게 됐다.
산다는 것, 새옹지마를 넘어 문 열고 나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치 앞도 모를 인생사다. 어쨌든 얼마만큼의 방사선 양과 얼마만큼의 기간이 소요될 건지, 부작용은 뭔지 등을 다음날이면 알 수 있게 됐다. 난 바로 그 ‘다음날’이 기다려졌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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