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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2011년 암 진단, 4기, 전원, 첫 번째 수술, 좌절

암삶 17-개복, 배를 연다는 말이 주는 복잡미묘한 감정 (2011년)

by 힐링미소 웃자 2021.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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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연다’는 말에 나는
끊기고 잘렸던
장면들이 생각났다,
아주 어릴 때 보았던.

 


시골에서
아직 전기도 안 들어오고
고샅길이 막
리어카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넓혀지기 시작하던 무렵
아끼던 미루나무가 잘리어지고
가죽나무도 잘리고
울타리로 쓰던 탱자나무도
잘리면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학교에 갔었는데
돌아와 보니

넓었던 채전 밭이 반은 잘려나가고
상체 잃어 망연자실 앉아 있었던
나무들의 밑동 마저
파헤쳐져 있었다.

이리저리 살피며
발걸음을 옮길 때
또 보았다.

동무와 올랐던 나무에 남아있을
추억이 눕혀지고
숨바꼭질하며 숨었던
둥지가 잘려나가고
삭정 가지 잘라 이것저것 만들며
소꿉놀이할 때면
시원한 그늘을 주던
그 넉넉했던 나무의 밑에 있던
그 그리움들이 다 눕혀진 채로
내가 내딛는 두 발의 발등으로 젖어옴을 느끼며
눕혀지고 뽑힌 추억들을 밟지 않으려
까치발 디디며
간신히 바깥마당에 올라
물끄러미
잘려나간 나무와
파헤쳐진 밑동과
반만 남은 채전 밭을 보며...
상처 나고
파헤쳐진다는 것이
잘려나간다는 것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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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크면
훗날
그런 모습 보지 않을 곳에
깊은 먼 곳에
터를 잡아
내 보금자리를 만들고
큰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집을 지어
또 잘려나가고
파헤쳐져도 분하고
원통하지 않을 만큼
조그마하고
소박하게 살아야겠다 했었다.

"환자분, 이쪽으로 오세요!"

나의 신기루 같던 상상은
갑작스러운 간호사의 부름에
비눗방울처럼 터져 없어졌다.

"선생님, 잠깐만요. 좀 더 여쭤볼... 게..."

"뭔데?"

“교수님, 수술은 어떻게 하나요?’

“어떻게? 나중에 자세히 안내가 되겠지만,
일단 배꼽을 중심으로
위로는 명치까지
옆으로는 옆구리까지...”

“......”

“열고요. 위나 장기들이 좀 많이 들춰질 것 같고...”

‘......”

“걱정할 건 없어요”

“……”

대략적인 설명을 들으며

어릴 때
그 잔인한 마을길 역사 장면을 떠올릴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이 하시는 거지요? “

“그럼…”

“고맙습니다…”

“나머지는 밖에서 간호사가 설명해줄 거니까.”

난 밖으로 나왔다.

어릴 때
눕혀지고
잘린
추억들을 안 밟으려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듯이.

 


이제 인생의 중간 토막 40,
그 중간 어디쯤에서인가
내 몸의 중간, 배꼽 있는 곳
그곳부터 삼각형으로
잘려
열려
큰 원으로 만들어지도록
사방으로 당겨져
밥통이며
내장이며
다 보인 채로

새하얀 수술대 위로
마취제에 눕혀진 내 몸이
하얀 시트를 붉은 천으로
만드리란 걸 상상하며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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