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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2011년 암 진단, 4기, 전원, 첫 번째 수술, 좌절

암삶 16-4기암 절제수술 결정과 병원 복도 풍경 그리고 암 코디네이터와(2011년)

by 힐링미소 웃자 2021.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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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연다’는 말에 나는 끊기고 잘렸던 장면들이 생각났다, 아주 어릴 때 보았던. 시골에서, 아직 전기도 안 들어오고 고샅길이 막 리어카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넓혀지기 시작하던 무렵,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아끼던 미루나무가 잘리어지고, 가죽나무도 잘리고, 울타리로 쓰던 탱자나무도 잘리면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학교에 갔었는데, 돌아와 보니 넓었던 채전 밭이 반은 잘려나가고, 상체 잃어 망연자실 앉아 있었던 나무들의 밑 동아리마저 파헤쳐져 있었고. 이리저리 살피며 발걸음을 옮길 때 또 보았지. 동무와 올랐던 나무에 남아있을 추억이 눕혀지고, 숨바꼭질하며 숨었던 둥지가 잘려나가고, 삭정 가지 잘라 이것저것 만들며 소꿉놀이할 때면 시원한 그늘을 주던 그 넉넉했던 나무의 밑에 있던 그 그리움들이 다 눕혀진 채로 내가 내딛는 두 발의 발등으로 젖어옴을 느끼며...

 

 


눕혀지고 뽑힌 추억들을 밟지 않으려 까치발 디디며 간신히 바깥마당에 올라 물끄러미 잘려나간 나무와 파헤쳐진 밑동과 반만 남은 채전 밭을 보며...

 

상처 나고 파헤쳐진다는 것이 잘려나간다는 것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거고, 그래서 내가 크면 훗날 훗날 그런 모습 보지 않을 곳에 깊은 먼 곳에 터를 잡아 내 보금자리를 만들고, 큰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집을 지어 또 잘려나가고 파헤쳐져도 분하고 원통하지 않을 만큼 조그마하고 소박하게 살아야겠다 했었던...

그런데 그날 그 교수님의 말을 듣고, 옛일이 생각나고, 잘려나간 추억들이 생각났다. 그 교수님 진료실을 나오기 전 그와 나눴던 대화를 복기했다.

"선생님, 잠깐만요. 좀 더 여쭤볼... 게..."
"뭔데?"
“교수님, 수술은 어떻게 하나요?’
“어떻게? 나중에 자세히 안내가 되겠지만,
일단 배꼽을 중심으로
위로는 명치까지
옆으로는 옆구리까지...”
“......”
“열고요. 위나 장기들이 좀 많이 들춰질 것 같고...”
‘......”
“걱정할 건 없어요”
“……”


대략적인 설명을 들으며  어릴 때 그 잔인한 마을길 역사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지만....

“교수님이 하시는 거지요? “
“그럼…”
“고맙습니다…”
“나머지는 밖에서 간호사가 설명해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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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쫓기듯 밖으로 밀려나 졌다.

"환자분, 이쪽으로..."
나의 신기루 같던 상상은 갑작스러운 간호사의 부름에  비눗방울처럼 터져 없어졌다. 어릴 때 눕혀지고 잘린 추억들을 안 밟으려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듯이 쪼그라든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인생의 중간 토막 40, 그 중간 어디쯤에서인가 내 몸의 중간, 배꼽 있는 곳 그곳부터 삼각형으로 잘려, 열려, 큰 원으로 만들어지도록 사방으로 당겨져 밥통이며, 내장이며, 다 보인 채로 새하얀 수술대 위로 마취제에 눕혀진 내 몸이 하얀 시트를 붉은 천으로 만드리란 걸 상상하며...


밖으로 나왔다.

“환자분 이리 오세요.”
“예”
“얼마나 놀라셨어요?”
“아직도 오락가락합니다.”
난 이제 상황이 바뀌어 수술 코디네이터를 마주하고 있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부드러운 미소와 관심 어린 질문 덕분에 한결 긴장이 풀렸다, 마치 동지라도 생긴 양. ‘나도 누군가에게 저래야겠다. 미소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울림 있는 관심 어린 질문을 해야겠다.’ 그러면서 그 C 교수님의 나에 대한 표정과 말투와 몸짓을 여전히 곱씹었다.

그 코디네이터는 나에게 조용히, 그러나 뚜렷한 목소리로 몇 가지를 더 덧붙였다,  예의 그 경쾌한 미소와 함께. 마치,
‘뭐든 도와드리고 싶은데…. 제가 도와드릴 건 많지 않고…. 안타깝네요. 어쩌지요?’
라는 듯. 그리고는 이 말을 끝으로,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 코디네이터는 다시 그 복도로 돌아가고.

나는 스테이션을 쳐다보며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그곳은 넓은 듯 좁은 홀이 있고 사방으로 이어진 복도를 통해 많은 듯 적은 듯,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변도로의 밤차들의 누운 불빛처럼 사람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웃는 사람, 흐느끼는 사람, 멍! 하고 있는 사람, 화난 표정으로 누군가와 이해 못 할 말로 통화하는 사람, 접수대의 직원과 한 말 또 하고 또 하며 실랑이하는 아주머니. 젊은 여자, 늙은 남자, 지팡이를 든 사람, 부인인듯한 여자의 끊임없는 투덜거림에도 눈을 감고 미동도 없는 채 앉아있는 남자. 옆에 있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리 흘끗 저리 흘끗하며 불안한 눈치와 시선을 던지며 끊임없이 자기는 여기가 아프고 저기도 아프다고 하는 할머니, 그리고 저쪽에서 큰 눈을 꿈뻑꿈뻑하며 유심히 나를 보는 듯 오고 있던 중년의 여자까지. 끊임없이 흐르던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감상으로 나의 불안감은  진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내 눈에 들어왔던 그 여자의 존재가 어느새 내 몸 바로 앞에서 멈췄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혹시, xxx 씨세요?”
라는 갑작스러운 질문이 이어졌고, 숨이 목까지 차오르는듯한 나의 힘없던 대답은 예정된 운명의 시작인 듯했다.
“예~에.”


그래서 예감은 그 어떤 과학, 통계보다도 앞설 때가 분명 있는가 보다 했다. 그녀도, 나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와서는 좌로 반 바퀴 우로 반 바퀴 방향을 틀곤 한 묶음이 되어서는... 이어지는 걸음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그녀의 사무실로 향해선 잠깐의 인연이 이어지리라는 걸 예감했으리란 거지.

서로 명찰도 없는데 미리미리 이름도 확인도 안 했는데 서로를 알아보는 거. 이런 데자뷔는 뜻하지 않은 시간,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아이러니의 압권이고, 가장 심각한 의문이고, 불가사의한 신비로움임이 틀림없었다.

그제야 그녀는, 난 첫 순간에 알아봤건만, 비로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수술 코디네이터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리로…. 제 사무실로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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