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 날 나는 간밤에 응급실에서 예약을 잡아준 대로 비뇨기과에 갔다. 간밤에 특별하게 부정적인 어떤 말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걱정은 안 했다. 난생처음 가는 비뇨기과! 그냥 며칠 동안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봤던 것 중에서 내가 가장 믿고 싶었던 대로,
“사타구니 어느 부분, 어딘가에 있는 모세혈관이 터진듯하다. 집에 가시라. 며칠 후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런 말을 기대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거의 모두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갖고 있으며 거기엔 거의 모든 정보가 나와 있는 시대가 되었다. 어떤 질병이 됐든 증상에서부터 대책까지 의사는 물론 간호사나 과학자 등이 참여하는 지식의 광장이 열린다. 또 거기에는 환자들이 관
객이나 조연 때로는 주연으로도 참여한다.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내가 샅샅이 찾아봤던 인터넷에는 주로 다음과 같이 안내하고 있었다.
“신장암(신세포암)의 비특이적 전신 증상으로는 피로감, 식욕부진, 체중감소, 발열, 빈혈 등이 있으나, 조기 진단되는 대부분의 환자는 아무런 증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암을 시사하는 소견은 아니며, 다른 원인으로 이러한 증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를 들면, 소변에 피가 나오는 혈뇨의 경우 요로감염이나 요로결석 같은 양성의 비뇨기질환인 경우가 더욱더 흔하며, 신세포암뿐만 아니라 방광암, 전립선암 같은 다른 비뇨기계 암에서도 나타납니다.”
최악과 차악의 경우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내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사실 애써 무시했었다. 최악의 경우를 인정할 경우에 찾아올, 닥쳐올 불안감, 아니 그걸 훨씬 뛰어넘을 공포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많은 가능성 중에서도, 그 많은 설명 중에서도 가장 정도가 약한 설명에 주목했었다. 그 약한 설명이란,
“소변에 피가 나오는 혈뇨의 경우 요로감염이나 요로결석 같은 양성의 비뇨기질환인 경우가 더욱더 흔하며….”
였는데, 그는 그조차도 애써 무시했었다. 그는 오로지,
“자전거를 심하게 타는 경우, 안장과 사타구니의 격렬한 마찰에 의해서 미세혈관이 터져......”
와 같은 어쩌면 말이 안 될 수는 있는 부분만 믿고 싶었고 기억하고 싶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고, 의식적으로 그것들만 기억의 창고로 보낸다고 한다. 그 사람이 듣고 싶지 않지만, 진실임이 분명한 99가지를 누군가가 말한다 한들 그가/그녀가 믿고 싶은 한 가지, 비록 잘못된 사실이라 해도, 그 한 가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99개의 단점이 있고, 장점이라곤 한 가지에 불과하지만, 그 한 가지 장점에 꽂히는 순간, 99개의 단점을 무시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치명적일 수도 있는 그 99가지를 재낀다는 말인데, 인간은 어찌 보면 참 비합리적이다는 생각이다. 평소에 나는 합리적이라고 자부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내가 얼마나 비합리적인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확증편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깨달았다.
언제나 그렇듯 진실은 냉혹하다. 꼭 피하고 싶고, 믿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현실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게 분명하다. 그 싫었던 진실이 현실이 되는 순간 다리는 풀어지고, 눈앞엔 어지러운 아지랑이가 어른거리고, 뒷골은 ‘띵~’한다.
간밤에 있었던 각종 영상 검사와 혈액검사에 대한 차트를 앞에 놓고 웃으며 나를 맞이했던 그 의사의 낯빛은 차트를 읽어 내려갈수록 얼굴에 있던 미소를 거둬들이며 무거운 표정의 그림자로 교체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뭔가가 있다!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라고, 빛보다 더 빠른 예감이 그를 덮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의사의 표정이 바뀌는 것과 동시에 두려움의 두께와 무게가 더해져 갔다.
“자, 초음파를 좀 해봅시다!”라고 그 의사는 말했다. 그의 지시와 동시에 나는, “점점 이상해 지네.”라고 혼잣말하며... 불길한 뭔가를 느꼈다. 가슴이 떨리고, 의기소침해지고, 불안해지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가족…. 보호자 분과 같이 오셨나요?”
“아니요…. 혼자요...”
“혼자요?”
“예......”
“하아, 보호자와 통화 좀 해야겠는데......”
“예? 꼭 요? 그 사람 지금은 회사에서 바쁠 것 같은데... 그냥 저한테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아니요! 보호자와 통화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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