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여름도 어느덧 정점을 향해 갔다. 찌는 열기와 무더위는 온몸에 있는 수분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짜내는 듯했다. 하지만 난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로 계속 누워있어야만 했었다. 정형외과 교수님의 처방이었다. 특히 깁스한 다리가 가려울 때는 정말…. 그런 서러움이 따로 없었다. 긁고는 싶은데, 손으로 피부를 만질 수 없는, 그저 딱딱한 석고뿐! 매미소리가 한 번 울 때마다 나도 울고 싶어졌다.
집에 오기 전, 병원에서 3주가량을 머물렀었다. 조금 더 있다 퇴원하라는 담당 교수님과 가족들의 권유를 뿌리쳤었다. 오래도록 있고 싶을 정도로, 의료진들은 따스했고, 친절했다. 재중 동포 간병인님도 참으로 친절하셨고, 배려심이 뼛속까지 배어있는 분 같았다. 그분께서도,
“좀 더 있다가 가시는 게 회복에 좋으실 텐데요….”
라고 말끔하시며 나의 퇴원을 만류했었다. 하지만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병원의 전반적인 공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가만있어도, 아니 더 있을수록 건강을 위해서나 경제적으로나 자기한테는 더 유리해!”
라고, 말하는 이성의 바람도 물리쳤었다.
방문간호사 제도에 대한 설명이 결심의 결정적인 이유였었다. 집으로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했었다. 소독이라든지 염증에 대한 대처를 위해서, 또는 짓무르는 정도 등을 파악하고 회복상태 등을 점검한 후, 만약 상태가 나빠질 때는 다시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는 게 그 서비스의 요지였다.
하지만 난 내 결정이 그렇게 현명한 건 아니란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실 귀가 첫날부터 결정적인 사고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출입구에서 넘어졌기 때문이었다. 담당 교수님께서 신신당부하셨던 게,
“넘어지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해라”
였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때 이미 가장 중요한 스크루 하나가 부러졌다는 사실이었다.
위에서 보면 뒤쪽으로는 히프 중간에서부터, 앞쪽으로는 사타구니 깊숙이에서 시작된 깁스가 아래로는 발가락 끝까지 에워싼 형국이었다. 그런 이유로 다리를 전혀 굽힐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병원에서는 그나마 그 친절한 간병인께서 날 화장실까지 데리고 들어가시고, 내 바지를 내려 주시고, 다시 올려 주시고 하는 일을 바로 옆에서 도와주셨기에 상대적으로 수월했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그분이 그러셨던 것만큼 숙련된 도움의 손길을 줄 사람이 곁에 없었다. 오로지 나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다.
집에 와서 부터는 바지를 입는 건 엄두도 못 냈다. 그저 넉넉한 트렁크를 여러 개 사서 옆을 완전히 트여서 입어야만 했었다. 그게 아니라면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는 게 도대체가 불가능했다. 양쪽에 목발을 디딘 채로 한쪽 다리를 180도로 스트레칭을 한 상태에서의 화장실에서의 배설은 환희나 기쁨이 아닌 고통 그 자체였다. 난 그 후로 인간의 자유 중에서, 권리 중에서 ‘신체의-구속당하지 말아야 할-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게 되었다. 자연법에서 나열하는 모든 자유, 권리 중에 제일로, 최우선으로!
그렇게 보낸 2개월과 함께 여름도 물러가는 듯했다. 정기적으로 찾아오셨던 방문간호사님의 아름다운 친절하심과 가족들의 보살핌, 오랜 친구들의 격려는,
"이 세상은 왜 나 잘난 맛으로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세상인가?"
에 대한 답을 준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사실 그 대답은 고민할 깜냥도 안 되는 화두였겠으나, 무식한 나는 그걸 참 꽤 고민했었던 듯했다. 사실은,
"내가 인간으로 이루어진 사회 속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인간과 살아야 한다’라는 간단한 명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 을 뿐이었는데도...
시간은 흘러 단풍이 들기 시작할 무렵, 난 병원을 향해 운전해 갔다,
“미쳤냐?”
는 말을 들어가며. 병원 가는 게,
“미쳤냐?"
가 아니고, 그런 깁스에 목발 상태로 ‘운전’해 가는 게
“미쳤냐!”
였지만... 그리고 정형외과 교수님께는 비밀로 할 생각이었기에…. 깁스를 이젠 풀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해야만 했고, 중단하고 있었던 항암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만 할 시간이 다가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다리 엑스레이와 폐와 복부에 대한 CT 촬영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했다.
CT실로 들어가며 마음이 쿵쾅거렸다. 사실 다리 수술 전 어느 날 이뤄졌었던 CT 검사에서는 내가
“항암제를 반드시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는 걸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고
나의 주치의께서는 말씀을 하셨었다. 그게 급작스러운 다리의 골육종이라는 뼈 전이로 인해 미뤄졌었던 것인데, 어쨌든 폐에 있는 다발성 암 덩어리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봐야만 했고,..., 이건 뭐 꼭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아마 나와 같았으리라.
아, 내 다리, 내 폐, 조영제 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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