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진단을 받고 나면, 특히 4기 진단을 받게 되면 유지해 오던 생업을 계속하기가 쉽지 않다. 정신적 충격 말고도 육체적으로도 힘들다. 그런 것들이 생업 전선에서 이탈하게 만든다. 그런 것들이 얽히고설켜서 심리적으로 의욕을 잃게 된다.
우선, 육체적으로 힘들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육체적으로 이상을 느껴서 병원에 가게 되고, 결국 암 진단을 받게 된다. 내 경우가 그런 경우다. 쉽게 지치고, 피로감이 오래갔다. 술을 마시던지, 늦게까지 일한 경우, 그전에는 하루 이틀이면 됐었다. 하지만 나의 2011년 전후는 뭔가 이상했었다. 3,4일을 넘겨 5,6일이나 지속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그런 몸의 상태에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낭떠러지에 선 기분이었다.
암 진단을 받으면 정신적으로 참 힘들어지게 된다. 암환자에 대한 인식이 요즘 많이 바뀌었다지만, 당사자나 주변사람들의 인식이 바뀐다. 그 시선이 무척 힘들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격랑을 만나게 된다. (이 모든 건 내 얘기였다.)
나는 최첨단 의료기계-CT촬영과 초음파 검사-를 동원한 검사결과를 부정했다. 그것도 며칠간이나. 입원해서 즉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교수님의 강한 권고, 그리고 그 권고에 의한 입원까지 했었으면서도 부정했다. 결국 하룻밤 자고 도망 나와서 다른 병원에 갔다.
다른 병원에 가서는, 첫 번째 대학병원보다 훨씬 큰 빅 5 중 하나, 부정 대신에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필... 내가 왜?"
그 분노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길었다. 첫 수술 후 한동안은 술을 안 마셨다. 그러나 거듭된 분노는 결국에는 폭주로 표출됐다. 그러면서 벽에다, 종이 위에다... 그 분노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출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이었을까! 다행스럽게도 그 폭주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어지는 단계는 타협이었다. 그래, 샛별이가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텨보자. 그러면서 옷가지들을 거의 대부분 버렸다. 상장이나 일기, 사진들은 모조리 스캔한 후 파쇄기에 다 갈아버렸다.
그다음 단계는 우울이었다. 부정하고, 분노하고, 타협까지 했는데도 우울이 또 찾아왔다. 인간이라서, 보잘것없고 힘없는 인간이라서 한 건 그런 우울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직접적 계기는 거듭된 검사마다 암이 커지고 있다는 결과를 듣는 것, 아무런 항암제도 처방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것들이 일상이 되면서 나타났다. 결론은? 이리 살아 뭐 하나!
결국은 죽음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또 말기암 단계에 나타나는 몸의 변화와 심리적인 상태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유서도 몇 번인가를 썼었다. 연명치료 거부라든지, 빨리 갈 수 있는 방법 등도 생각했었다. 어무도 없는 깊은 산속, 부러지지 않을 나뭇가지를 찾아보기도 했었고... 결국 모두 죽는다는 사실만 확인했고, 내겐 그게 빨리 왔을 뿐이란 것... 그걸 수용하게 됐다. (물론 40대 중반은 너무 빠른 건 사실이다.)
그 단계 이후에 나타나는 건,
"그래, 얼마 안 살 거, 잘 살다 가자. 추한 몰골 안 보이려면 나름 건강하게 살다 가자. 잘 먹고, 약도 한 번 써보고, 되도록 웃고, 그리고 내 경험을 나눠갖자..."
난 4기 진행성 전이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첫 수술을 받은 후에도, 항암제 처방을 안 해주는 상태에서도 생업을 이어갔었다. 그러다가 한계를 느껴 진단금으로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진단받은 암, 그 암에 쓸 항암제는 연구하는 회사를 선택해서.
또한 지역사회 봉사활동, 전국 단위 학회 세미나 고정 멤버, 더 왕성한 교우 관계, 별이 되신 어머니 지방 대학병원 진료마다 동반했고, 요양원 들어가셔서는 2주마다 문병 갔고, 대리 진료를 받으러 다니고, 진단 전보다 더 많은 독서를 하는 등 나름 정상인 행세하며 살고 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벌써 4기 진행성 전이암 투병 13년 막바지까지 도달했다. 이번달이 지나면 14년째로 넘어간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드는 상대적으로 생각은 많다. 내가 설정한 두 가지 '선'에 어긋나는 것들이다. 내가 간직하는 두 가지는,
- 단순해져라
- 웃어라
그 두 가지에 어긋나는 건, 돈 문제다. 내가 사는 경제적 체제는 자본주의다. 물론 요즘은 이 경제적 시스템이 정치적 시스템으로까지 진화 중인 걸 안다. 어쨌든 돈 문제로부터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거, 그런 현실을 실감하곤 한다. 마치 산소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애써 산소를 무시할 수 없듯이 말이다. 몸속에 산소 없으면 몸이 더 이상은 몸이 아니듯이, 이 경제 시스템에서 돈이 없다는 건 생계가 안 될 테니 말이다.
오늘 15년 만에 옛 동료를 만났다. 자본주의 본산인 여의도, 그곳에 있는 많은 상업빌딩들... 그중에서도 상징적인 건물에 그의 회사가 있다. 수십조 원을 다루는 회사다. 그런데 그는, 내가 알기에,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은 한 명 빼고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정상에 올리와 있다. 그쪽 분야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 중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짜 금융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문에 페라리를 걸어 놓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나름 성공적인 게 틀림없다. 이 친구와 스벅에서 커피를 나누며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이 친구는 50 고개를 막 넘기는 있는 친구다. 위로 올라갈 단계는 하나뿐이라고 했다. 난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180도가 달랐다......
어떤 반응이었을까? 뭘 하고자 하는 걸까? 또 푼돈이라도 모으고 싶으니 업계 비밀노트 좀 공개해달라는 나의 부탁에 이 친구는 무슨 대답을 하고 있는 걸까? 예상보다 오래 살고 있는 난(아직 60 전이다) 어떻게 병원비를 대고, 기름값을 벌고, 식료품값을 구하고, 샛별 교육비를 도와줄 수 있는 걸까?
단순해지고, 항상 웃고 싶은 내가 앞으로도 그럴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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