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진료를 마치고 약국에 들렀다. 약국 안은 어김없이 인산인해 그 자체였다.
내가 진단받기 전에는 약국 갈 일이 거의 없었다. 감기도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었다. 그때는 약을 한 꾸러미씩 들고 약국을 나서는 사람들을 보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또 한편으로는 뭔 놈의 약들을 저리 많이도. 그런 생각들도 간간이 들었었고…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런 모습이 돼버렸다.
뇌졸중 관련으로는 고지혈증 약, 혈액 묽게 만드는 약.
암 관련해서는 항암제.
항암제 부작용 완화 목적으로는 피부 항생제, 갑상선호르몬제, 고혈압 약, 지사제.
어제는 그중 다행(?)스럽게도 항암제만 받아왔다. 약을 받아 나오며 주치의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했었다.
"관리를 잘하시니까... 이 정도로 유지를 하고 계시며... 최고의 성적을 내고 계시며..."
그러나 난 안다. 운이라고.
모두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관리를 잘들 할 거라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운이 없어서, 난, 여적까지는, 운이 좋아서...
항암제만 해도 같은 약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효과가 다르다고 한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 같은 약을 먹더라도 암 속 암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고 한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딱 내 경우다.
내가 먹었던 보트리엔트라는 표적치료제는 폐 속 다발성 폐전이 종양에는 잘 들었지만, 육종성 변이에 의한 골종양에는 안 들었다.
그런 경우를 어떻게 표현할까? 복불복, 케바케?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다. 내 노력과는 다르게 운이 나쁘거나 운이 좋거나 한 경우일 수도 있ㄷ을 거라는 뜻이다.
내가 암에 걸린 것도 어쩌면 운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다른 말로 운이 없어서 암에 걸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이언스라는 과학잡지에 실린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암에 걸리는 사람들의 50%는 운이 없어서라고 한다. 세포분열 중 우연히, 정말 우연히 오류가 일어난다고 한다. 또 대략 30% 전후는 유전적일 확률이 크다고 하고. 비로소 나머지 20% 전후가 발암 환경에 노출돼서라고 한다. 그러니까 암 환자들의 겨우 20% 전후만 후천적이라는 말이다.
어떤 이들은 담배를 아무리 많이, 오랫동안 피워대도 폐암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한다. 암을 회피하는 인자가 그 사람들 몸속에 있어서라고 한다.
음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아무리 부어라 마셔라 해도 다른 곳들에는 이상이 생길는지 모르지만 음주에 의한 간암으로부터는 안전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역시 알코올에 의한 간암에 맞서는 그 무엇이 그들의 몸속에 있어서라고 한다.
내가 태어난 것,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다. 성북동이나 평창동 갑부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 그런 의미에서 태아가 설계하고 프로그래밍한 결과일까? 아니면 운일까?
각 지역 중학교에서 소위 1,2등 한다는 애들만 모이는 고등학교가 있다고 치자. 같은 학교에 들어간 애들 모두 다 소위 명문대학에 들어갔을까? 같은 대기업 입사동기들이 다 사장이 임원이 되고, 사장이 되는 걸까?
같은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은 다 같이 성공적 변호사가 되는 걸까?
부잣집에 태어나 최고 대우를 받으며 컸다한들 다 해피한 인생들을 갖고 있을까?
10억 번 사람들은 불행하고 100억 번 사람들은 행복할까? 100억 벌면 만족할까? 100억 자산가라 떠버리는 사람들은 1000억 자산가들 앞에서는 어떤 모습들일까? 여전히 그들 앞에서 부자라고 떠벌일까?! 1000억 자산가들 다음엔 2000억, 1조, 10조 자산가들은 없을까?
건강도, 학벌도, 재산도 제 잘라서, 노력만으로 그리 된 것들만은 아닐 것이다. 운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더 중요한 하나 더, 모든 건 상대적일 수 있다는 거. 못 배운 사람들은 불행하고 많이 배워 석, 박사 된 이들은 더 행복할까? 재물이 많은 사람들은 그보다 못 가진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까? 만족할까? 벤츠 위에 벤틀리는 없나? 벤틀리 위에 페라리는? 그 위에 코니세크는? 거의 모든 것들은, 태어남과 죽음을 제외한, 상대적이지 않을까?
어떤 암 환우들은 나보다 더 잘 관리하고, 더 엄격하게 절제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내가 그분들보다 더 살고 있다면 그건 운 말고 뭘로 그 이유를 나타낼 수 있을까?! 보스턴대 '100세 연구' 책임자에 의하면 누군가 90세 장수를 한다면 생활습관이 70%, 유전적 운이 30%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가 110세까지 산다면? 유전자 복권인 운이 70%라고 한다.
그러니 겸손할 일이다. 내가 지금 나름 이리 항암 성적을 내고 있다한들, 바로 그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4기 암은 암세포들이 퍼질 대로 퍼져 이미 변이를 나타내는 단계가 아닌가! 난 그보다 더한 변이에 의한 변이를 나타내는 경우 아닌가!
그러니 손 안의 한 마리 새 보다 덤불 속 새 두 마리를 쳐다볼 게 아니다. 내일이 어떻고, 담 주가, 담 달이, 내년이 어떻고, 내년에 뭘 할 거고가 아니다.
지금, now,를 감사하며, 즐기며, 찬미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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