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먼 나라로 떠나는 건 내겐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염려와 뿌듯함. 그 둘 중 뿌듯함이 더 크다고 생각해서 딸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더 큰 세계에서, 더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을 확장시키는 일은 청춘에게는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가자마자 뜻하지 않던 장애물을 만나면서 염려가 커졌다. 딸의 곤란함을 같이 해결하면서, 세상사 역시 돌발변수의 연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내 인생의 무대지만 거기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는 배우가 주인공인 나 말고도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리라. 그들 각각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주인공이겠고…
딸은 성적 편견이나 집착을 갖고 있지 않다. 아마 자기 아빠의 교우관계를 많이 보면서 성장해서 그럴는지도 모르겠다. 아빠 생각과 유사하게 세상엔 남성과 여성, 딱 두 가지 성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성적 스펙트럼이 있다는 걸 아는 듯하다. 그런 점을 난 높이 평가한다.
나는 10대 말부터 성과 연령, 국적을 구별하지 않고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남자는 꼭 여자와, 여자는 꼭 남자와 연애해야 하는 건 아니며, 현실 또한 꼭 그런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많이 봤고, 그걸 존중해오고 있다. 딸은 아빠의 절친들 중에는 경제적 약자, 건강약자, 성소수자들도 있다는 걸 안다.
딸이 대학에 가면서 성을 따지지 않고 다양한 교우관계를 하는 걸 보며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같은 대학 어떤 친구와 자정을 넘겨 술을 마시고 있다며 늦게 들어갈 것 같다고 해서 누구냐 그렇더니 남자 과친구, 어떤 친구와는 인생 네 컷을 찍었다 해서 봤더니 남자애였는데, 어떤 관계냐고 물었더니 아빠답지 않게 별 걸 다 물어본다며 그냥 친구란다. 남자애와 밤늦게까지 어울려 술을 마신고, 인생 네 컷을 찍는다 해서 왜 아빠 딸이 그들을 이성으로만 생각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과 말투로 자기 아빠가 마뜩잖다는 듯 어필하곤 했었다.
그런 그에게 난관이 닥쳤다. 같은 집을 쓰게 될 사람 3명이 모두 남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남녀를 유별나게 구별하지 않는 딸이었지만 임대업체에서 제공한 정보에는 혼성이었다. 임대계약체결 마지막 단계인 서명이 끝나고 '보냄' 버튼을 누르고 나서 확인 답변서를 보고서야 그게 의도적이었던, 착오였던 사실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아차! 했다. 딸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 플랫 메이트들이 모두 남자들이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제공했던 사실과 달라서였다. 난 컴플레인과 클레임 둘 다 거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을 했으나 말로 표현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딸은 했다. 그런데 그쪽의 답변은 딸의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아니라 아주 조그만 게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또 깨달았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미 이쪽 대학 저쪽 대학 관련 절차를 다 마쳤고, 항공권도 이미 세팅이 됐고, 옷이며 행정절차 등을 다 마치고 출국만 기다리던 단계였기에 일단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현지에서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사하는 것으로 결정을 봤던 것이다. 그런데 14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것과, 여독을 풀기 위해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 묵는 것까지만 즐거운 단계였음을 알았다. 다음날, 앞으로 쭉 생활할 그 집 앞에 도착하고서야 딸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딸은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편하게 갔다고 했다. 내 친구의 절친이 딸을 픽업하기 위해 공항에서부터 애써줬기 때문이었다. 큰 종이에 자기의 이름을 쓴 금발 여성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양손을 높이 들며 기다리고 있었고, 최신형 빨간색 BMW 컨버터블에 실려 호텔까지 왔고, 그분이 체크인까지 도와줬을뿐더러 호텔에서 커피까지 같이 마셨으니, 그 오래된 도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더군다나 박물관이나 미슬관에 가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말하며, 로밍이 끝나고 혹시 전화번호가 바뀌면 꼭 말해달라고 하면서 호텔을 떠났으니 말이다. 그런 후 아늑한 호텔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설레는 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딸이 나와 채팅을 하기 시작할 때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키를 건네기 위해서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안 나타난다며, 8층짜리 엄청 큰 아파트 앞에 덩그렁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사진을 보내왔다. 그 사람은 딸이 문자를 읽지도 않고 있다고 했다. 그런 데다가 밖의 날씨는 춥다고 했다. 딸은 초대형 여행가방과 중간 크기 가방에 보스턴 백, 더하고 군인들이 사용할 만한 큰 백팩, 거기에 내 토미 여권 백까지 메고 있었다.
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난 사실 딸의 초기 적응을 위해서도, 내 30년 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도 딸과 함께 항공기를 타기로 했었다. 그런 이유로 정형외과 교수님과 그 팀의 협조를 얻어 수술 날짜를 최대한 당겨서 하기로 했던 것이었는데... 수술 후 결과가 기대만큼 좋지 않아서 교수님께서 허락을 안 했던 거고, 난 그 말씀에 다를 수밖에 없었다. 딸도 자기가 낯선 곳에서 헤매는데 들이는 에너지보다 아빠를 케어하는 데 들이는 에너지가 더 클 거 같다며 말렸고... 결국 스물 갓 넘긴 딸만 장도에 올랐었다.
그 남자가 자기가 보낸 메시지도 안 읽고 있고, 약속시간도 안 지킨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두 시간 넘게 연락이 끊겼다. 난 내가 안 따라간 걸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이제 막 스무 살 넘긴 딸에게 너무도 큰 일을 혼자서 하게 했다는 죄책감까지 들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두 시간째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눈 빠지게 기다리던 딸의 소식이 드디어 폰 채팅창을 깨웠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 남자를 만났고, 집 안에 들어갔는데, 청소에 관련된 얘기를 거의 한 시간 넘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설명이 너무 친절했단다. 난 거기서 뭔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만나기로 한 시간 가까이 되는데도 메시지 확인을 안 한다-답을 안 한다-약속시간이 지난다-8,600km를 날아온 사람을 추운 날씨에 밖에서 기다리게 한다-여장을 풀고 휴식도 안 한 사람에게 청소 얘기를 1시간이씩나 한다-그런데 설명이 자세하고 친절하다?
뭐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도 그다음 날도 딸의 태도가 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쪼그라들고 있고, 쫓기고 있고,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아빠인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를 이루는 DNA의 반을 나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시 못할 일체성과 연대감을 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딸은 어릴 때 내 껌딱지였고, 나도 딸의 껌딱지였다. 4기 암 진단을 받으며 난 딸에게는 부족하고 못된 아빠가 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통하는 건 많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끼며 무슨 일인지 물었고, 나는 사실을 듣고 나서는 경악했다. 그렇게 성차별을 넘어 성추행니나 성폭력적이고, 문화적 편견에 찌들고, 무례하며, 비인간적인 플랫 메이트가 딸과 함께 그 작은 공간 안에서 같이 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까지 망가진 사람이 플랫 메이트 중에 있게 될 줄은 어찌 알았으랴. 딸이 자초지종을 말하며 캡처해 보낸 메시지들... 딸 말을 들어보니 그 사람은 분명히 공격적으로 딸을 푸시했다.
"남자 친구 있어요?... "
"이 나라에 친구가 있나 봐요?..."
"이번 주말에 뭐 하세요?... 술 마시나요?... "
"같이 나가서 술 한잔 하면서 뭐 좀 같이 먹고 싶은데, 그럴래요?"
......
그 사람의 성인지 감수성, 성인식,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타 문화권에 대한 통찰과 배려 등이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세상엔 남성과 여성, 그 두 가지 성만 존재한다는 편협한 인식은 역겨울 정도였다. 어떻게 이성만 보면 데이트나 연애의 대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지... 어떻게 본지 하루밖엔 안 된 사람에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물어볼 수나 있는지, 그리고 여자에게는 그 연애상대가 어찌 남자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나를 닮았는지 딸아이는 자신과 다르게 보인다고 해서 이성으로만은 절대로 안 본다. 그전에 사람으로 본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딸의 아빠인 나는 그 정도가 더 심한(?) 편이다. 난 암 진단을 받으며 사람들을 더 다양하게 보고 있다. 난 건강 약자다. 거기에다가 보행장애인으로 신체적 약자다. 그러니 경제적 약자, 성적 소수자, 교육적 약자 등 사회엔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고 있고, 그들을 존중한다. 난 그저 이 사람은 남성호르몬의 비중이 훨씬 더 높은 사람, 약간 더 높은 사람, 저 사람은 여성호르몬 비중이 아주 많이 놀은 사람, 좀 더 높은 사람, 그 비중에 변화가 있는 사람.... 그렇게 신체적 변화가 항상 일어나는 측면에서 인간을 보기도 한다. 의학 관련 지식을 얻어가면서 성이란 게 남성성과 여성성, 그렇게 딱 두 개만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걱정거리는 더 있다. 이 사람, 엔지니어라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 머무른단다. 그래서 무서워서 밖에도 못 나가고, 공유 주방도 사용 못하면서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단다.... 그 외에도... 불편한 점이 많아도...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하소연했다. 아, 가엾은 딸!
난, 대책이 필요했다. 내가 비행기 타고 14시간을 날라 갈 것이냐? 귀국결심에 동조할 것이냐? 당장 딴 집 알아보라고 할 것이냐? 아니면 그 나라 멀리 떨어진 친구에게 부탁할 것이냐? 아니면 강의 시작 전 며칠간 그 나라 여행을 권할 것이냐? 그 나라에 딸이 아는 친구나 동생, 언니가 있는지 알아보고 만나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물어볼 것이냐?.....
ㅌ
난 우선, 호텔로 거처를 옮기는 게 어떠냐고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다른 숙소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 나라 내 친구도 난리가 났다. 숙소까지 태워준 그분도 난리가 나긴 매한가지였다. 메이데이 휴가를 단축할 채비까지 한다고 했다... 딸도 그 사람의 출신국과 문화를 탓하기 시작했다.... 난 그것만은 멈추게 했다.
"그건 나라와 민족, 남성이냐 여성이냐의 문제가 아니란다. 사람의 문제란다. 이제 시작이란다. 너도 이젠 21살, 이제 아빠와 같이 이 곤경을 잘 헤쳐나가자꾸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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