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입원 날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부모님께는 어쨌거나 말씀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여러 나날, 여러 번,
마음속을 들랑날랑했다.
부모와 자식이란 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숙명 아닌가?
자식한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양이면
전날 밤 부모님의 꿈자리에 나타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게 아니라면...
길을 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무슨 걸쩍지근한 생각이 든다든지 하는….
말씀을 안 드리고 수술했는데
나중에 아시면
소외감이나 서운함이 깊지나 않으실까?
시간의 문제일 뿐...
어차피 언젠가는 아시게 될 텐데….
나는 이것저것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내가 암 수술하는 게 처음이 아니고
두 번째라서 가방을 싸는 게 더
능숙해진 듯했다.
하지만 나는 무슨 여행이라도 가는 듯
이것저것 넣는 게 어색한 나머지,
불안하기도 했다.
병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수술을 몇 시간 앞두지 않고 낙상이라도,
아니면?
수술 중에 과다출혈이라도?
아니면 마취가 안 풀려 혼수상태?
별 해괴한 생각도 다 한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누가 도대체 앞날을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언제나 난, 어떤 경우가 됐건, 중요한 결정과 마주하면
언제나 본능과 이성, 아니, 본능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 간의 경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본능은 저속하고 미개한 것일까?
이성은 고상하고 수준 높은 것일까?
글쎄다......
역시 그날도 본능과 이성간 대화가 열뗬다.
“그저 2~3일 정도 묵을 정도면 되지 않을까?”
“아니지. 얼마나 있을지는 의사들이 결정할 일이고….”
“…….”
“또 잘못이라도 되면….”
“잘못?”
“왜, 딱히 잘못되는 경우를 말하는 게 아니고…. 뭐 변수 같은.”
그렇지. 변수란 게 항상 존재하지. 세상이 어디 내가 원한대로, 예상하는 대로만 되었던가?
“그래! 변수란 게 있지.”
병원엔 다음날 오후 1시까지 가기로 했다.
오후 내내 봄바람에 흔들리며
햇살 받은 생명의 파장을
내 눈에 비추곤 했던 나뭇잎들도
이제는 어둠에 묻힌 채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문득문득 반짝이고 있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어느새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빠, 수술 잘 받아.”
란 말 외에는 다른 표현을 남기지 않은 채
딸은 학교를 향했다.
어릴 땐 수다스러웠던 딸이었다.
붙임성도 많았었고,
더군다나 늘 아빠 옆에 붙여 다녔었다.
언젠가부터... 그랬던 딸이 변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전히 남의 집 딸인 듯 느껴질 정도는 아니니
아직은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5학년이 된 후로
등하교를 항상 같이하는 애가 생겼는데….
기대했던 것보다는
실망스러운 순간들이 문득문득
보이곤 한다.
"딸의 새 친구에 대해서 뭔가 좀 알아봐야겠군..."
그런 생각은 생각으로만 끝났었다.
입원하는 날 아침 풍경은 단출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나는 불어오는 화사한 바람에 이끌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갑작스러운 암 진단에, 수술에,
그런데도 손도 못 댄 전이암들에,
암 덩어리들이 자라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폐에,
그전 해 말까지도 이어졌던 돈벌이,
이젠 종을 친 돈벌이에….
정말 뭐가 뭔지 모를 2년이었다.
하지만... 그리고는 이제 나는 다시
의식과 자가호흡을 잃은 몸뚱이로 변해
수술대 위에 눕혀질 것이다.
잠시 그런 모습으로 누워있을,
그들의 수술 대상이 된,
나의 몸뚱이에서 빠져나온 의식은
어디에 있으려나?
열려있는 창문 사이로 보이는
직박구리 몇 마리는
활짝 핀 목련화 이것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태평스럽게 지저귀기만 할 뿐이었다.
2년 전에도,
작년에도 왔었던 너희들이라면
한 번쯤은 날 좀 쳐다보고,
수술 잘 받고 오라! 는
지저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내가 내년에도 이 창가에서
이렇게 너희들을 또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기에.
택시가 집 가까이 거의 도착했다는 신호가 왔다.
“…….”
“너, 창밖을 보며 누구에게 중얼거려.”
“…. 그래? 택시?”
“어, 택시. 편하게 오가자고... 차 안 가져가기로 했잖아.”
“그렇지? 그래... 그래 가자.”
역시 본능과 이성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눈다.
그래!
이성만으로만, 본능만으로 만... 세상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입원 절차를 마쳤다.
우선 6인실로 배정되었다.
수술한 후에
쾌적한 2인실이나 3인실 또는 4인실로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6인실은 번잡하기는 해도
사람들 속에 있으면 좀 더 안정은 된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기도 하고,
다양한 인간관계들도 볼 수도 있다.
어떤 땐 흥미로운 가족들도 볼 수 있고...
입원비도 아낄 수도 있고.
물론 환자마다 병력이나 처방이 제각각이어서
한밤중에 시도 때도 없이 오는 간호사분들이나,
아직 공동체 의식이 충분하지 않거나,
배려심이나 신중함이 없는 일부 환자들은
밤늦게까지 TV를 틀어대기도 해서
심란한 맘을 더 심란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 게 싫어서 2인실을 신청해보지만,
뜻대로 안 된다.
대기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입원 시 의례적으로 따라오는,
또는 필수적으로 이루어지는
혈압이나, 특이 증상, 음식에 대한
알레르기 등의 리포트가 이루어졌다.
입원 시 주의사항 등을 적은 것들이
머리맡에 놓였고...
그러는 사이 부지런히
집에서 가져온 속옷이며 양말 등을
가지런하게 사물함에 정리해야 했다.
생수는 머리맡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과도 머리맡에...
그런 나의 행동을 내 몸을 벗어난 본능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시 들어온 간호사 선생님은
다정한 목소리로 이것저것을 다시 묻고 적고.
몸무게며 신장과 같은
그런 추가적인 일을
미소 띤 채로 일사천리로 했다.
병원에는 사실 의사들만 있는 게 아니다.
난 이 간호사분들이야말로
일선에서 환자의 손가락을 잡고 있는
병원의 손가락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내 상태를 봐주고,
무슨 일이 있으면 한밤중에라도 뛰어오고...
뭘로 다 그 고마움을 표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 병상이 정리되자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왔다.
몸을 눕혔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걱정을 미리 가불 해서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자꾸만 자꾸만 생각이 났다.
"자, 폐에 있는 것들 중에서 큰 덩어리들을 떼낸다. 나머지 자잘한 것들은 놔둔다. 그런 상태로 표적치료제라는 표적 항암제를 먹는다. 그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피곤해졌다.
눈을 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안 됐다.
다시 그 친절한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리곤 내 팔을 잡고,
고무줄을 감고,
피를 한 여섯 통은 빼고...
링거도 꽂고.. 다 끝나자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애드벌룬을 타고
순식간에 저 깊은 계곡으로 급강하하는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떤 아저씨가 휠체어를 끌고 내 곁으로 왔다.
“타시지요!”
“예? 뭐 하러 가나요?”
“촬영하러 가셔야 한답니다. 폐 CT 실로요.”
“아, 네!”
늦은 오후,
드디어 5명의 소규모 군단을 이끄시고
그 ‘칼잡이’ 교수님이 나타나셨다.
작은 체구의 노 교수님이셨지만
내게는 마치
거대하고 활기 넘치는 거인으로 보였다.
사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교수님이 내로라하는 ‘칼잡이’란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사실이었다.
단점이라면...
"'항암’ 같은 건 난 안 해!"
주의자이시니... 너무 많은 걸
기대할 수는 없는 분이시다는 게
문제지만...
“CT 촬영은 했을 테고, "
"예, 교수님”
“xxx 교수가 자꾸 해달라고 하니까…. 내가 잘할 거니까, 에, 그리 걱정은 마요.”
"그런데 교수님, xxx 교수님께서 희망하시는 대로 그 큰 것들만 딱 떼어낼 수 있으시지요?”
“폐란 거 자꾸 건드리면 안 돼. 그렇게 맘대로 막 잘라내거나 도려낼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래도….”
“글쎄~. 폐는 한번 열어봐야 알지. 뭐 잘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낼 어쨌든 잘해봅시다. 알았지요?”
"예, 교수님. 잘 부탁드립니다, 살려주세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 교수님은
엷은 미소를 입가에 살짝 걸친 채
날 다시 한번 쳐다봤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안경 낀
레지던트인듯한 여자에게 물었다.
“낼 첫 번째인가?”
“예. 교수님.”
그 교수님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일찍 주무셔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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