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이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 몸은 바퀴가 달린 침대 위에 눕혀있었다.
그런 채로 어디론가로 이동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천장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이며, 벽이며 내부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해서
다시 깨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먼저 안도했다.
내 몸이 눕힌 채 굴러가던 이동침대 옆에
생각지도 못했던 누군가가 어렴풋이 보였다.
누구일까?......
올 사람이 누굴까?
정상적이라면 마취가 풀리는 건
시간의 흐름에 정비례한다.
이동침대가 더 굴러갈수록
정신은 돌아온다.
시야도 더 또렷해진다.
익숙한 냄새는 그 존재를 짐작케 했다.
뜻밖에도 아버지가 계셨다.
집을 나오셔서 택시를 타셨던지,
아니면 버스를 타셨을 것이다.
그런 후 역으로 가셨을 테고
이어서 몇 시간짜리 기차를 타셨을 것이다.
그런 후 서울역이나 영등포역에 내리셨을 것이고 아마 택시를 타고 오셨을 것이다.
80이 넘으신 분이 출타하시기엔 먼 길이시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신 아버지...
질곡의 삶을 살아오신 분...
난 언젠가 그 아버지에 대해서 뭔가를 써서 하늘에 뿌릴 것이다.
바람 세차게 부는 어느 날에......
아버지는 그냥 날 쳐다보시기만 할 뿐 말씀이 없으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내가 아버지를 향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표현을 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런데 아버지 말고도
또 다른 사람이 보였다.
ㅅㅈ!
그녀가?
그녀는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건 20대 말? 30대 초?
그녀의 인생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중의 한토막을 나와 함께 공유했었다.
부러워할 성적으로 치대를 졸업해?ㅆ다 했다.
그 후로 잘 되다가... 늘 그렇듯, 인생이란 게,
아주 개 같은 경우를 만났고...
그 경우는 그녀를 곤경에 빠뜨렸고...
그때 날 알게 됐었다.
사람 일이란 게...
나와 많은 얘기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고,
공원을 산책하고,
많은 공감을 이뤄가던 어느 날,
난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기회가 오면,
새로운 인연이 오면...
운명처럼 맞이하라고,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맞이하라고.
시간이 많이 흐르고...
그녀는 아주 '좋은 사람'을 만났다.
그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내게 해줬다.
난 그런 존재는 찾기 쉽지 않으니 니 옆에 소중히 두라고 했었다.
그 후 많은 자랑을 했었다.
난 축하했었고, 더 깊이 들어가는 건 어떻냐며 격려했었다.
잘 살고 있다는 소식, 너무 자주도 너무 오래도 아닌 시간의 간격 속에서 내게 일러주곤 한다.
나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런 소중한 친구가
그녀가 이동침대를 따라오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ㅅㅈ아, 사랑해... 고마워, 와 줘서..."
모든 존재는 아름답지만...
그중 나와 연이 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 희소성!
그 존재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다.
"그런데 나 어디에서 나온 거지요, 어디로 가지요?"
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물은 게 아니었다.
"지금 회복실에서 나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런 나의 궁금증에 도우미께서 나직이 말씀하셨다.
"이제 중환자실로 가십니다.”
중환자실?
난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몸 상태도 아닌 듯 느껴졌다.
중환자실로 들어오면서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듯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했다.
눈앞의 어렴풋함으로
내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우선 회복실이 아닌 건 분명했다.
시계를 봤다.
아까 희미한 정신으로 회복실에서 나오며
봤던 시간이 아니었다.
아주 많이 흐른 시간 뒤였다.
내가 거꾸로 매달려있는 듯한
아련한 기분이었는데,
서서히 정신을 차려보니
분명 똑바로 누웠던 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오른쪽 옆구리 쪽으로 크고 작은 구멍이
4개나 뚫려있었다.
나갔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거지...??"
야전병원? 영화 속 전쟁터의?
그냥 첨단 시설,
첨단 장비로 소품들만 바뀌었을 뿐이지,
죽음이 쉼 없이 아른거리며 교차하는
그런 분위기의 야전병원...
서서히 주변을 돌아봤다.
별의별 모습의 환자들로 꽉 차있었다.
"그래, 내가 지금 중환실에 누워있구나!...
... 암울한 공기!
어디 공기가 눈에 보이기야 하겠냐마는.
아, 이런 게 중환자실 공기구나,
절망의 공기!"
내 눈은 창가를 향했다.
비스듬히 누워있는 어떤 환자가 보였다.
두 눈이 풀려 있었고,
입가에선 무언가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수개월을 보내고 있다는 걸,
나중에 나를 돌보던 간호사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의 몸에 있던 살은 다 사라지고,
뼈 위에 비닐을 씌운 듯
피부는 그렇게 지가 감싸고 있는
골격을 다 드러낸 채로 있었다.
그는 말도 못 하고, 소리도 내질 못하는 듯했다.
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선
끊임없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시간 동안,
주기적으로.
심한 통증에 그런다 했다.
하도 오랫동안 강한 진통제를 써온 이유로,
이제 그의 몸은 진통제에 내성이 생겨,
어느 진통제도 잘 듣질 않아서가 했다.
내 바로 옆을 봤다.
내 옆에 계셨던 그분은
얼굴이 하도 부어서,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분명하지 않은 얼굴에,
시도 때도 없이 구토를 계속하고 있었다.
저 멀리 병상의 어떤 분은
10가지는 족히 될 듯한
여러 종류의 호스와 주사와 계측기를,
누운 몸 여기저기에
주렁주렁 매달고,
참으로 보기 딱하게도
간신히 호흡을 이어가는 듯 보였다.
"아, 여긴 생지옥......"
난 잠시 눈을 감았다.
이런 환경 속에 누워있는
내 몸에도 반복적으로
진통제가 투여되기는 매한가지였다.
폐의 한 부분을 잘라낸 뒤라
숨을 잘 쉴 수도 없었고......
밀려오는 통증은
마취가 풀려가는 몸이 감당하기엔 너무 컸었다.
진통제의 수명은 짧아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곤 했었다.
그러나 깨고 보면 한두 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잠깐의 수면이었다.
그래도 나는 종종 잠을 깨기라도 했다.
내가 주목하고 있던 어떤 환자는
하루 종일 눈을 안 뜨는 것 같아
간호사한테 물어봤다.
"저분은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그 간호사 선생님은 나직이 내게 말했다.
"계속 수면 상태에 있는 분이세요."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상상해봤다.
"그도 두 눈을 감은 채로
한없이 위로 올라가고,
절벽으로 떨어지고,
구름을 탄 듯 허공에서 나풀대고 있을까?
내가 잠들면 잠시 잠시 그러하듯이?"
그런 생각이 들자 그가 한없이 가련해 보였다.
문득 여기저기 분주히 오가며
이런저런 궂은일을 하고 있는
간호사 선생님들에 생각이 미쳤다.
중환자실에 근무하는
간호사분들은 내겐 천사들로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천사들이
내 곁에 있다 한들
나는 다시는 중환자실에 있고 싶지 않았다.
어디 그게 뜻대로 될까만은......
나는 다행히 며칠 만에
그곳에서 나왔지만,
병원 중환자실에서 웃으며,
정성 어린 보살핌을 주고 있는 간호사분들께
언제나 온갖 행운이 함께 하고,
늘 건강들 하시길 빌었다.
또 몇 날이 될지도 모를 기약 없는 예정으로
그곳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
모든 환자분들의 쾌유를 빌었다.
하지만 중환자실은 여전히 내겐 트라우마가 되고 있다.
내가 언제 또 그곳에서
누워 있게 될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